[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수용소 철책 너머의 세상은 아름다웠다

김봉규 2022. 9. 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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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_오스트리아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마우타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내려다보는 바깥 풍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나치 시절에도 있었던 초목지대 농가들은 평화롭고 푸근했다.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잠깐씩이나마 철책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수감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저 풍광을 바라봤을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오스트리아 마우타우젠 강제수용소는 언덕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바깥세상이 발아래로 펼쳐져 보였다.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이 수용소 철책 경계선 부근에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철책 너머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나치 시절에도 있었던 초목지대 농가들은 평화롭고 푸근하기만 했다. 린츠/김봉규 선임기자

나치 시절 강제수용소 가운데 마지막으로 해방된 곳은 오스트리아 공업도시 린츠의 마우타우젠이다. 2019년 3월5일 찾은 이곳에서는 수많은 공장 굴뚝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연기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린츠 시내에서 버스로 마우타우젠에 도착하자, 마우타우젠중학교 학생들이 등굣길에 재잘대고 있었다. 정겹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수용소 방향을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 경사진 언덕길을 걸었다. 꼬불꼬불한 길은 갈수록 좁아졌는데, 길 양옆으로 큰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마을 들머리에는 성모마리아상과 촛불이 있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뒤이어 널따란 초원지대가 나타났고, 언덕 끝 제일 높은 꼭대기에 거칠고 칙칙한 요새 같은 게 보였다. 나치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강제수용소 마우타우젠이었다. 수용소 정문 근처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옮겨 심은 수령 100년은 훌쩍 넘긴 큰 버드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이곳에서 최소 9만여명이 학살됐는데, 처음에는 아우슈비츠처럼 독가스(Zyklon B)를 사용하다가 나중엔 즉석 이동식 가스실(자동차 배기관이 내부로 연결된 트럭)이 근처 마을 구젠을 오가며 한번에 30명씩 죽였다. 나중에는 120명까지 가둘 수 있는 고정식 가스실도 만들어졌다.

마우타우젠은 채석장 노동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평균 체중 40㎏이던 수감자들은 50㎏가량의 화강암을 끊임없이 날라야 했고, 노쇠해져 더는 일할 수 없는 이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수용소에 도착한 수감자들의 기대 수명은 3개월에서 6개월 사이. 이곳에 수감됐던 스페인 출신 사진작가 프란시스코 보시는 수감자들 신분증 사진을 찍고 수용소 행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네거티브 필름 2000여장을 숨겨뒀고, 이 사진들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했다. 그의 일생은 2018년 <마우타우젠의 사진사>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우타우젠 수용소의 가장 큰 특징은, 나라별 개인별 희생자를 추모하는 표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벽은 벽면 전체가 영정사진으로 가득 메워진 ‘추모의 벽’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스실, 화장터 등 내부시설을 지나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자 검은 대리석 바탕에 셀 수 없이 많은 깨알 같은 것들이 보였다. 다가가서 살펴보자 이곳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이름이었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마우타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내려다보는 바깥 풍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나치 시절에도 있었던 초목지대 농가들은 평화롭고 푸근했다.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잠깐씩이나마 철책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수감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저 풍광을 바라봤을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문득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 하고 주인공으로 출연한 홀로코스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올랐다. 영화의 음악 때문이다. 영화 초반 나오는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가운데 ‘뱃노래’와 영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선율은 한낮에 따스한 봄 햇볕을 맞으며 소풍을 즐기는 듯 낭만적이다. 나치 시절 수용소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이를 살려낸 줄거리는 슬픔 속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데, 수용소 너머 널따란 들녘에서 그 영화음악 속 플루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수용소 앞을 흐르는 다뉴브강 너머 저 멀리 마을 성당의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저녁으로 수용소에도 종소리가 들려왔을 텐데, 당시 종을 치는 이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한참 동안 종탑을 바라보다 터벅터벅 내리막길을 걷는데 때마침 아침에 마주쳤던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등교 때보다 하굣길이 더 즐거운 법. 시끌벅적한 재잘거림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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