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엘리자베스여왕의 후회
사고 수습에 나선 해럴드 윌슨 총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사고 현장에 가서 슬픔에 빠진 주민들을 위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여왕은 "나보고 쇼를 하라는 것이냐? 여왕은 그런 걸 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뒤늦게 사고 현장을 찾았던 여왕은 영국 국민들이 왕실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람들이 나를 봐야 내 존재를 믿는다"고 했는데 이런 믿음은 애버밴 사고를 통해 얻은 교훈에서 비롯됐다. 이후 여왕은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때론 위로했고 때론 함께 기쁨을 나눴다.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군주제가 영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지되는 이유도 왕실의 이런 역할과 관련된다. 특히 정치가 양극화될수록 왕실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강해진다. 영국 왕실 한 인사는 "정치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들에 관한 것이고, 군주제는 우리를 통합시키는 것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영국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아픔을 위로하는 국왕으로서의 모습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적인 품격과 카리스마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찰스 국왕이 어머니와 같은 품격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주제에 대한 여론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치료 과정을 담은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국민이 기대하는 것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해답이 있다.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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