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원이라도 받자" 눈물의 땡처리..중고 기계 매물 쌓여간다
◆시화기계유통단지 가보니
도미노 폐업에 중고기계 쏟아져
'정밀감속기 1원' 등 헐값 속출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어" 한탄
영세 제조업 가동률 60%대로 뚝
"금리 더 오르면 못버텨" 한숨만
경기도 시화공단에서 TV와 휴대폰 등에 쓰이는 인쇄회로기판(PCB)을 가공하는 A사는 30년 이상 사용한 외형 가공 프레스 7대를 최근 매물로 내놓았다. 일감이 급감하면서 경영 여건이 악화하자 자식 같은 기계 15대 중 7대를 처분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가운데 1대는 잘 아는 관련 업체에 팔았지만 나머지 6대는 중고 기계 유통단지에 내놓았다. 13일 만난 이 회사의 대표는 “공장 4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2곳을 처분했다”며 “사업 규모를 줄여도 일감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근에 위치한 열처리 업체 B사의 우편함에는 먼지로 뒤덮인 우편물이 쌓여 있었다. 공장 문이 굳게 닫힌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인근 금형 업체 C사의 상황도 비슷하다. 공장 문은 열려 있지만 내부는 어둡다. 공장 가동이 한창일 오후지만 근로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두 회사 모두 공장을 매물로 내놓았지만 몇 달째 매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장 매물 전문 중개 업체 대표는 “경기 침체로 일감이 줄어든 데다 지난해의 경우 최저임금이 크게 인상되면서 버티지 못한 사장들이 공장 문을 닫고 있어 중고 기계 매물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전했다.
원자재 값 급등과 글로벌 공급 차질 악화, 경기 침체 장기화 등의 ‘복합 위기’로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사업을 접으면서 공장 문을 닫는 중소 제조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업체들도 중고 기계 설비를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벼랑 끝 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 따르면 상반기 기준 2019년 266건이던 중고 기계 매물은 2020년 289건, 2021년 374건으로 급증했다. 올 상반기는 245건으로 주춤한 모습이지만 연말에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국가산업단지 내 제조 업체와 수출 중소 업체들의 폐업 추세가 치솟기 때문이다.
제조 업체의 폐업이 급증하며 설비 매물이 쏟아지고 있지만 거래가 안 돼 고철 용도로 팔려나가는 사례도 늘고 있다. 쓸 만한 기계를 고철로 내다 파는 것은 중고 기계 시세는 떨어지는데 그나마 고철 값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고철을 뜻하는 철스크랩 ㎏당 가격은 지난해 280원 대에서 올해 500원대까지 올랐다. 한 기계 거래 업체 대표는 “중고 매물을 사들이는 영세 중소 업체도 경영난에 빠지면서 거래절벽에 직면해 오히려 고철로 기계를 파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부품·수리비를 아껴 운영자금이라도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올해 올라온 매물이 이전과 다른 점은 ‘눈물의 땡처리’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상반기에 등록된 매물 가운데 ‘고속 금형 가공기 5만 9999원’ ‘사출성형기 9999원’ ‘정밀 감속기 1원’ 등 헐값에 나온 중고 기계 설비 매물이 즐비하다. 또 다른 중고 매물 거래 업체 대표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워 견디기가 힘들다”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프레스 등을 취급하는 또 다른 거래 업체 대표 김 모 씨는 “대당 500만 원은 받아야 하는 선반을 최근 250만 원에 겨우 팔았다”며 “코로나19 이전에는 한 달에 10여 대를 팔았는데 지금은 2대조차 팔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제조 중소 업체의 경영난 실태는 수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영세 제조업의 평균 가동률은 60%대 후반대로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73.4%) 수준을 밑돌고 있다. 폐업 공장이 속출하는 현상 역시 법인 파산 건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2019년 769건, 2020년 879건, 2021년 955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500건이 넘었다.
노민선 중기연 연구위원은 “중소 제조업의 환경이 악화한 데다 불황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업종 전환이 이뤄지면서 기계 설비 매물이 급증하고 있다”며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중기 업계는 금리 인상의 후폭풍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신용도에 따른 가산금리까지 붙기 때문에 금리 인상의 충격이 한층 크다는 이유에서다. 6월 말 기준 대기업 대출 증가 규모는 4조 3000억 원으로 전월보다 증가 폭이 1000억 원 축소됐다. 반면 중소기업 대출 증가 규모는 1조 1000억 원 불어난 8조 9000억 원을 기록했다. 늘어난 대출은 금리 인상 악재와 맞물려 이자 폭탄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상반기 중기 대출 연체율은 0.27%로 대기업(0.23%)보다 높았다.
반월공단에 위치한 주물 업체 D사의 대표는 “한 달 대출이자만 2000만 원인데 금리가 더 오르면 사람을 내보내고 공장 가동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6월 말 기준 전체 중기 대출 규모는 931조 원에 이르는데 금리가 계속 오르면 건실한 중소기업도 부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현호 기자 hhle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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