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 건전 재정 실천 수단될까..위기 상황 정부 역할 제한 우려도

이창준 기자 2022. 9. 1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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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

국가 재정 운용의 기준이 되는 재정준칙을 조속히 법제화하겠다고 선언한 윤석열 정부는 그 추진 배경으로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객관적인 운용 기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 정권에서 재정을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용해 재정적자와 국가 채무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전문가들은 재정 준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경제 위기 상황에서 경직된 재정 기준을 섣불리 적용하면 정부가 스스로 손발을 묶는 자충수로 돌아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우려했다.

기획재정부가 13일 내놓은 재정준칙 도입 방안에는 관리재정수지를 GDP(국내총생산)대비 마이너스 3% 수준으로 유지하고 국가 채무 비율은 GDP 대비 60% 이하로 관리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것)에서 최근 흑자를 내고 있는 사회보장성 기금 수지를 제외한 지표로, 통합재정수지보다 더 엄격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 채무 비율이 60%를 넘기면 관리 재정 수지 적자 상한은 2%까지 낮아진다. 정부는 당장 올해 말까지 이 같은 내용을 법에 명시하고 내년부터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재정 준칙 도입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 계속돼왔다.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기재부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일관되게 강조하며 방만한 재정 운용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재정 운용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정부에서도 기재부는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3%라는 재정 준칙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1년 넘게 상임위 단계에서 계류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년여 간 코로나19 관련 지출로 재정 적자가 빠르게 늘어난 점은 새 정부가 재정 준칙 법제화를 강하게 추진하는데 동력을 보탰다. 지난 2017년 660조원 수준이었던 국가채무는 올해 기준 1000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됐다. 문재인 정권 5년간 416조원이 늘어난 것인데, 이전 두 정권 10년 간 늘어난 부채액(350조원) 보다도 많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이제부터라도 재정 씀씀이에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건전재정 기조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섣부른 재정 준칙 도입으로 인한 재정운용의 경직성을 우려하고 있다. 재정운용 기준이 구체적인 수치로 법에 명시되고 나면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재정을 통해 정책적으로 개입할 운신의 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장기적인 지속가능성을 위해 재정운용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은 맞는 얘기지만 (기준을) 수치로 못박게 되면 상황에 따라 민간 경기가 부진할 때 정부가 해야할 역할을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물가 상승 여파로 올해 4분기부터 내년까지 경기 회복세 둔화가 전망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적극적 재정 개입 여지가 차단된다는 점에서 재정준칙은 현 시점 족쇄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김유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전 조세재정연구원장)는 “당장 내년부터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 위기가 겹쳐 소득 하위 계층이나 중소기업 등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며 “감세는 해놓고 (재정준칙을 통해) 지출은 늘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정부가 스스로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대 기획재정부 2차관이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재정준칙 도입방안 및 예타제도 개편방안 브리핑’에서 주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

정부는 전시나 국가 비상사태, 대규모 금융위기나 코로나19 위기 등 재난적 상황에서는 재정준칙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예외 사유를 법에 명시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추경 편성 등을 놓고도 과거부터 여야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점 등을 들어 이 장치가 실제 적시에 작동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재정준칙 도입과 동시에 바로 예외 상황에 맞딱뜨릴 가능성이 큰 점도 준칙을 당장 법제화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요소다.

김 교수는 “예외 규정은 상황마다 ‘이것이 예외 상황이 맞느냐’를 놓고 여야가 싸우게 되는 정쟁의 도구로만 쓰일 가능성이 높다”며 “적어도 지금은 준칙을 도입할 시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정부가 제시하는 준칙의 수치 기준이 재정건전성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3%의 재정적자 비율과 60%의 부채비율은 유럽연합(EU)의 경제통합조건 등을 합의한 30년전 마스트리흐트조약(Treaty of Maastricht)에서 가져왔다. EU는 발족 당시인 1993년 국가별로 이같은 재정 운용 기준을 각각 지키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기준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유럽 재정위기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 기준을 넘어섰다. 하 교수는 “당시는 특정 국가가 국채를 너무 많이 발행할 경우 다른 국가가 피해를 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서로 자제하자는 취지에서 해당 규칙을 설정한 것”이라며 “이론적으로 최적의 수치라는 보장도 없고 이를 기계적으로 지키는 유럽 국가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야당의 반대를 넘기 어렵다는 점은 재정준칙 법제화의 현실적인 장벽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과거 여당 시절 문재인 정부가 내놓았던 재정준칙 방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창준 기자 jch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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