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세계화 이끈 미국이 자유무역을 뒤흔들고 있다

조형래 산업부장 2022. 9. 1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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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의 대만 봉쇄로 ‘반도체 핵 겨울’ 올까 봐 우려
경제성보다 안보 우선하는 새로운 무역 질서 구축에 나서
변화의 물결에 빠르게 올라타는 빠른 추격자 DNA 되살려야

현대·기아차는 수소차에 발이 묶여 전기차 출발이 늦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기동력과 뚝심을 앞세워 올해 깜짝 성장세를 보였다. 상반기 미국 현지 전기차 판매량이 작년보다 무려 317%나 급증하며 테슬라에 이어 점유율 2위에 올랐고, 아이오닉5·EV6 등 신차 출시 때마다 현지 미디어와 시장 평가 기관의 호평이 이어졌다. 블룸버그는 지난 6월 “미안해요 일론 머스크, 현대가 조용히 전기차 시장을 장악해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제 가장 핫(hot)한 전기차는 현대차에서 나온다. 현대차는 단 몇 개월 만에 테슬라의 지난 10년간 판매 실적을 따라잡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머스크 스스로도 자신의 트위터에 “현대차가 꽤 잘하네”라고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북미에서 생산하지 않는 전기차에 대해 최대 76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으로 현대차의 초기 성장세에 제동이 걸릴 위기에 처했다. 폴크스바겐·볼보·닛산 등 다른 완성차 업체들은 그나마 북미 생산 모델이 보조금 대상으로 살아남았지만 한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해 수출하는 현대차는 해당 모델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현대차그룹이 무려 100억달러가 넘는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질 한번 없이 전격적으로 법안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반응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도 미국 반도체 지원법의 중국 투자 제한 조항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법안에는 “미국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들은 향후 10년간 중국에 첨단 공장을 짓지 못하고, 저가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경우에도 중국 시장에서만 판매해야 한다”는 강력한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한마디로 중국에서는 반도체 추가 투자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고향인 시안에 낸드 플래시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 중국 우시에 주력 D램 공장을 두고 있는 SK하이닉스 모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작년 말 미국 인텔의 중국 소재 낸드 반도체 공장을 90억달러에 인수한 SK하이닉스 안팎에서는 인텔이 미국 당국의 규제 움직임을 미리 알고 중국 공장을 매각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1990년대 디지털 전환과 세계화를 앞세워 제조 강국 일본·독일을 따돌리고 세계 유일의 수퍼 파워에 오른 미국은 자신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구축한 세계화와 자유 무역을 뒤흔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싼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까’라는 의사 결정 기준이 지금은 ‘어디서 생산하는 게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로 바뀌었다. 10년 전만 해도 보호주의(protectionism)는 미 의회에서 ‘반칙’과 동의어로 통했지만, 지금은 미 상무부 장관이 반도체 지원법을 브리핑하면서 “법 시행의 첫 번째 목표는 국가 안보”라고 대놓고 말한다. 미국에서 필요한 첨단 반도체의 75%를 한·중·대만이 생산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이나 봉쇄가 현실화될 경우 미국의 첨단 산업 전체가 마비되는 ‘반도체 핵 겨울(semiconductor nuclear winter)’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에 누구도 이의 제기를 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미국의 우파는 세계화가 중국과 러시아 같은 적성국의 팽창을 초래했다고 뒤늦은 반성을 하고,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소득 양극화와 기후변화를 가속화했다며 탈(脫)세계화에 동조하고 있다.

지난 30년간의 글로벌 경제 체제를 뒤집는 탈세계화와 공급망 재편은 많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값싼 노동력이 무한히 공급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마이클 스펜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경고대로 고물가가 일상화될 수 있다. 당장 세계화의 상징인 아이폰 신제품 가격은 공급망 혼란 속에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작년보다 15~20%가량 오를 전망이다. 미국 소프트웨어, 한국 부품, 중국 제조라는 세계화의 성공 방정식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제조 강국 독일과 일본이 디지털 전환을 주저하다가 IT 산업 경쟁에서 탈락했듯이 탈세계화 속에서도 새로운 승자와 패자가 나뉠 것이다. 이런 때야말로 뒤통수 맞더라도 속이 뒤틀리더라도, 설령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매몰 비용(sunk cost)이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변화의 물결에 편승해야 한다. 한국 특유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DNA를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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