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어둠 속에서 더 빛난 배우들
조명 없는 곳에서도 최선 다한 그들의 춤과 노래 눈부시게 빛나
큰 배역 아니어도 뜨겁게 연습하던 모습 떠올라 어느새 눈물이..
9월 초에 창작뮤지컬 ‘첫사랑’을 올렸다. 작곡가 김효근 선생님의 가곡들로 구성한 뮤지컬이었다. ‘첫사랑’ ‘꿈의 날개’ ‘내 영혼 바람되어’를 비롯한 십여 곡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담아냈다. 배우들은 주요 배역과 앙상블 배역(춤이나 코러스를 하는 역할)으로 나뉘었다. 주인공의 아들인 ‘지우’라는 배역이 있었다. 공연 내내 아버지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역할이었다. 무대에서 자신이 드러나진 않지만, 주인공이 드러날 수 있도록 바라봐주고, 옆에 있어주고, 나란히 걸어주는 인물이었다. 이 배역만큼은 앙상블 배우 중에서 정하고 싶었다. 이들은 평소에도 무대의 주인공들이 빛날 수 있도록 바라봐주고, 옆에 있어주고, 나란히 걸어주는 배역들이었기에 지우의 마음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이 배우들을 이번에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재능도, 경력도, 배우를 시작한 계기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번갈아 지우 역할을 부탁하며 한 명 한 명 파악해나갔다. 3주가 지나니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저마다의 결을 지닌, 훌륭한 지우였다. 같은 묵묵함도 강인한 묵묵함과 섬세한 묵묵함이 있었고, 같은 그리움도 서글픈 그리움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었다. 결국 음악감독과 논의하여 노래를 통해 지우를 정하기로 했다.
때마침 그 날은 모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연습 현장을 참관하러 온 날이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당연히 긴장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었다. 내가 아버지와 어떤 추억이 있었고, 어떤 순간에 이별을 했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를 느끼고 있는지. 다른 배우들도 돌아가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로의 사연을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한 배우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이 배우를 A라고 부르자.) A는 역시나 맨 처음이라 그런지 노래 내내 긴장된 목소리였다. A는 훌륭하게 해냈지만 스스로가 만족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모든 배우의 노래를 듣고, 역시나 고민이 생겨서, 지우의 최종 결정을 며칠 후로 미뤘다. 그렇게 매일매일 연습을 해나가는 한 편, 지우를 정하기 위한 모임도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A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루의 연습이 끝나면 따로 연습실을 구해서 계속 노래연습을 한다고 했다. 다른 배우들도 그 연습실에서 함께 노래연습을 하며 서로에게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마음이 울컥했다. 공연은 단 3일이었기에 한 명의 지우만 정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도저히 한 명만 정할 수가 없었다. 제작사인 마포문화재단에 양해를 구하고 두 명의 지우를 뽑기로 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지우가 결정되었다. A는 아쉽게도 지우를 맡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맡은 파트의 연습을 성실하게 해나갔다.
A가 유일하게 홀로 등장하는, 아주 짧은 장면이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에 불과했다. 대사도 없고 손짓만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었다. A는 공연 바로 직전까지도 그 손짓을 쉴 새 없이 연습했다. 100분의 공연시간에 존재하는, 단 몇 초의 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내는 A의 모습이, 그리고 또다른 B,C,D,E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마침내 막이 오르고, 모든 배우가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빛나게 펼쳐냈다.
연습 참관을 왔던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마지막 날에 공연을 보러왔다. 막이 내린 후 로비에서 만난 그의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다. 공연을 보다가 어느 순간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앙상블 배우들이 어둠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셔터 불빛으로 주인공을 비춰주는 장면이었다. 이 프로듀서는 그때 확연하게 보았다고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주인공을 향해 열심히 빛을 비추며, 그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A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어둠 곳곳에서 마찬가지로 뜨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B,C,D,E의 모습을. 이들에게는 아무런 조명이 비취지지 않았지만, 그 짧은 몇 초동안 가장 눈부시게 빛났다고. 그 짧은 몇 초가 흐르는 동안, 연습실에서 보았던 이들의 모든 노력이 무대 위에 눈부시게 흘러갔다고. 그 눈부심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모두 떠올라서, 그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어느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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