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신뢰와 감시 사이

이진준 뉴미디어 아티스트·KAIST 교수 2022. 9. 1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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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감시 사이

설치 작품을 만들 때 반사 효과를 활용하기 위해 거울을 즐겨 쓰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클로드 글라스(Claude Glass)라는 볼록거울을 종종 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프랑스 화가인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이름을 딴 거울이다. 이 거울 덕분에 화가들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릴 때 넓은 시야의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블랙 거울로 만들어져 희미하고 분위기 있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얼마 전 편의점에 갔다가 구석에 달린 볼록거울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까 감시하기 위해 달아 놓은 거울이다. ‘안전 거울(security mirror)’이라고도 불린다. 이 감시를 위한 거울이 진화한 것이 CCTV다. 골목 구석구석에 달린 CCTV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안전’을 위한 것인지 ‘감시’를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몇 년 전 중국 작가 쉬빙은 ‘잠자리의 눈(Dragonfly Eyes)’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감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표했다. 쉬빙은 각종 CCTV를 모아 콜라주 필름을 만들어, 거대한 불신의 시스템에 갇혀 감시하는 쪽도 결국은 감시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안전과 감시의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독일에 처음 갔을 때 기차역에 검표대가 없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무임승차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돼 있기에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물론 가끔 무임승차를 했다가 검표인에게 걸리면 엄청난 과태료를 내야 하니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기차역에 검표대가 사라진 지 꽤 됐다. 무임승차를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커졌겠지만, 그보다는 전산 시스템이 발달해 자동으로 좌석 확인이 되기 때문인 듯하다. 신뢰 회복보다는 기술의 진보가 불필요한 절차를 줄였다는 이유가 더 클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불신의 시대, 기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담기 위한 도구에서 감시 도구가 된 볼록거울의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닐까.

이진준 뉴미디어 아티스트(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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