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아이들의 일상을 돌려줘라
“공부시키는 건 아예 배제했어요. 건강에 더 이상 문제 없이 자라기만 바랐을 뿐이에요.”
“중학교 1학년인데도 미취학 어린이들처럼 낮잠을 자야 해요. 학교 다녀와서 낮잠을 안 자면 저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예요.”
지난달 31일 가습기살균제 참사 11주기를 기해 보도한 ‘11년 맞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아동·청소년 피해자 일상생활 지원 절실’ 기사를 취재하면서 통화한 어린이·청소년 피해자의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한 것이 있다. 자녀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일상생활 및 학업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학교에 가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다 잠이 드는 일상생활조차 전쟁처럼 치러야 하는 자녀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앞으로 사회에 나가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이 어린이·청소년 피해자 부모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확인된 수로만 1789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참사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 가해자 처벌, 재발 방지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한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과제 중 하나다.
이 가운데 피해자들의 일상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국 사회의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은 아직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 피해자들은 평범한 어린이·청소년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회적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폐기능이 약하다 보니 체육 시간에는 항상 앉아서 친구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경우부터, 수업 도중에도 건강 상태가 악화돼 병원에 실려가는 경우까지 어린이·청소년 피해자들의 일상생활은 가시밭길 그 자체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 피해자들은 학업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한국환경보건학회지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겪은 어린이·청소년은 학업 성취도가 다른 어린이·청소년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게 나타났다. 이는 피해 어린이·청소년의 학업을 포함한 일상생활에 대한 보조·지원이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근거 중 하나다.
어린이·청소년 피해자의 일상에 대한 보조·지원은 단순히 학업을 돕고,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가의 환경성 질환 피해자에 대한 접근 방식이 피해자들의 삶을 평범한 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까지 가습기살균제뿐 아니라 대부분의 환경성 질환, 환경오염 피해 사례에서 정부나 가해기업의 배·보상은 금전적 방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 어린이·청소년의 일상 회복을 위한 보조·지원을 실시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환경성 질환에 대한 태도를 질적으로 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피해자를 배·보상의 대상만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되찾아야 할 인격체로 보는 관점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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