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 역대급의 정치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2022. 9. 13. 0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힌남노라 불린 초대형 태풍이 지나갔다. 큰 태풍이 아니라도 한창 낟알이 차는 시기여서 벼가 쓰러지면 어쩌나, 수확기가 다 된 과일이 떨어지면 어쩌나, 농부들의 걱정이 컸다. 바람이 잦아든 뒤 읍내를 돌아보니 비가 많이 내리면 넘치던 하천도 큰 탈 없고 무너진 곳도 없었다. 나무가 쓰러져 도로를 막은 곳이 있다는 소식도 있었으나 며칠 동안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피해가 크지 않았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그렇지만 태풍의 경로에 있던 남부지방을 생각하면 그 피해가 적었다고 보기 어렵다. 피해의 규모가 다를 뿐 강한 바람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은 심각한 자연재해이고, 그동안 한국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혀온 자연재난도 호우와 태풍이다. 가을태풍이란 말처럼 태풍이 오는 시기가 늦춰지는 것도 수확기 농작물에 피해를 크게 준다. 피해가 적은 태풍은 없다.

이번 태풍의 경우 문제는 ‘역대(歷代)급’이라는 표현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인터넷에는 기상청을 조롱하고 역대급 호들갑, 사기라며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다고 정부가 태풍으로 김건희씨 관련 뉴스를 덮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비난과 음모론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20년에 노르웨이 기상청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의 기상앱을 쓰고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여론조작 시도가 빚어낸 음모론도 낯설지 않다. 심각한 재난상황일수록 정부의 말을 듣기보다 스스로 정보를 찾아 판단하는 게 생활화된 한국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음모론의 씨앗은 시민들의 상상력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이고, 그 불신은 자연재난을 사회재난으로 바꾼다.

불신은 자연재난을 사회재난으로

지지율이 낮은 윤석열 정부 입장에선 태풍에 잘 대처해서 점수를 좀 따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지난 집중호우 때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니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잘하려는 의도를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의도만큼 대응도 실질적이어야 하는데,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5월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에서 ‘선진화된 재난안전 관리체계 구축’을 목표로 내세웠다. 디지털 재난관리체계 구축, 민관 협업을 통한 재난 대응역량 제고 등을 주요 정책으로 다뤘는데, 이런 구상이 지금의 재난에 효과적일까? 잦아지는 기상이변을 예측할 체계를 만들 인력이나 예산확충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재난 이후의 대응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태풍에 큰 피해를 본 곳들 중 한 곳은 경북 포항시이고, 포항시는 2017년에도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이다. 재난이 반복되는데 포항시는 안전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을까? 개인에게 지급되는 지원금도 필요하지만 재난에 강한 도시 인프라, 탄력성과 회복력을 갖춘 사회구조, 협력과 신뢰를 증가시킬 관계망 등도 필요한데,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대응은 다분히 관행적이다.

재난 시에 가장 많은 정보와 자원, 권한을 가진 정부가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시민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사실 역대급은 없던 현상이 아니라 그동안에 있던 현상을 가리키니 역대급 태풍이란 말은 가장 강력한 태풍이 아니라 기존의 태풍이란 말이다. 문법으로 따지면 잘못된 표현이고, 표현이 불러오는 긴장감에 비해 내용은 추상적이다. 이제는 역대급이 조성하는 불안감보다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

태풍 외에도 예고된 위기들이 심상치 않다. 환율은 계속 올라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380원을 넘어섰고, 물가인상 속도도 빠르다. 코로나19 위기도 3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 가격도 계속 오르며 경고등을 깜빡거리고 있다.

다가올 여러 위기에 대응해야

초대형 태풍도 계속 올 거고, 여러 위기들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규모로 올 수 있다. 1차적으로는 정부가 이런 위기들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고, 이상과 변동이 심하니 정부가 조금 과잉된 대응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들과 함께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재난에 대한 대비가 꼭 정부만의 역할은 아니다. 기후위기처럼 전 지구적인 위기에는 정부가 제 몫을 하도록 시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 9월24일로 예정된 기후위기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기후정의행진이 그 출발점이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