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개인이 정치적 주체라는 착각
새 정치 주체 찾기 논의가
최근에 한창이다
새 정치 주체 논의는
세대교체론이 주를 이룬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려는 순간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수업 때 학생들에게 종종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자유롭다고 느꼈냐”는 것이다. 답은 대체로 “느끼지 못했다”이다. “그럼 어떤 느낌이었냐”고 다시 물으면, 거의 예외 없이 “피로감을 느꼈다”고 답한다. 그리 답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다시 살펴보면 피로감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피로감은 강의실의 학생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출근길에 보는 사람들에게서도 감지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그렇다. 피로감은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표정에만 묻어 있지 않다. 그게 지하철이든 버스든 간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는 공간의 대기에 배어 있기도 하다.
자유가 아무리 소중한 가치라고 해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자유라는 말과 그것에 상응하는 느낌의 여부를 확인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고 물을 수 있으리라. 그냥 잘 잤는지, 몸이 개운한지 등의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하고 순간적으로 먼저 다가오는 느낌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맞다. 그럴 것이다. 그럼 왜 자유로움을 느꼈냐는 물음을 던지느냐고 다시 물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나는 피로감을 느낀다는 답이 실제 얼마나 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아침의 피로감을 그냥 일상 혹은 정상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뭔가 특이한 상태로 인식할 필요가 없겠냐고 말을 걸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작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네 삶의 현실에 대한 진단, 즉 (탈)현대인의 실존 양상과 특성을 짚어보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또한 그 진단의 관점과 기준이 자유를 둘러싼 인간의 복잡한 생각과 감각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음을 논하기 위해서다. 그럼 또 물을 수 있으리라. 그런 진단은 도대체 뭐에 쓰려는 거냐고. 일파만파 이어지는 물음과 답의 오고감이 필요할 것이나, 여기서는 일단 간결하게 몇 개의 답변을 제시하고 넘어가자. “그 놈의 정치 때문”이라고. “좋은 정치를 구상하기 위한 토론”을 위한 것이라고. 논의의 범위를 좁혀 하나의 주제로 압축하자면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모색을 위한 논의의 전제”를 마련하기 위해 ‘개인(주의)’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해보려는 것이라고.
필자는 개인은 더 이상 정치적 주체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정치적 주체로 여기는 것은 작금의 시대에서는 착각에 불과하며, 그런 착각으로는 새롭고 좋은 정치를 결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어도 그렇고, 영웅적 인물로 형상화되고 대표된다 해도 그렇다.
개인이 더 이상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홀로주체’라는 허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적 삶의 영위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헌법상의 기본적 요건들(일자리·교육·건강·주거환경 등)의 구비마저 능력주의 신화를 추종하며 모두 홀로 감당하느라 피로감에 젖어 자유로울 수 없는 ‘과잉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개인이라는 개념의 본래 뜻에 걸맞지 않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할 공적 이성과 전복의 용기와 사랑의 창조성을 상실한 ‘결핍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체가 될 세대가
따로 있는지 의문이다
모든 세대 걸친 사람들이
개인이지 못한 개인의 삶,
홀로·과잉·결핍의 주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필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상 오해의 소지가 있겠다 싶어 짚고 넘어가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죽음’에 대한 선고는 필자를 포함해 하루하루 피로감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에 대한 힐난과 무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필자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보통사람들을 홀로주체·과잉주체·결핍의 주체로 만들어 개인으로 살 수 없게 강제하면서도 개인이라 ‘호명’하며 골수와 영혼을 빼먹어 결국 개인의 의미를 왜곡하고 무덤에 파묻은 ‘지배질서’이다. ‘피로사회’ ‘승자독식사회’ ‘소유 혹은 세습 자본주의’ 등으로 불리는 그런 질서 말이다.
애초 계몽주의자들이 포착해낸 개인은 이성을 지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기 완결적 존재(individual)를 가리킨다. 그래서 원자와 같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문학적 형상화와 인격화가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이다. 그는 난파선에서 건져낸 물건들로 무인도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문명세계를 조성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이 있다. 무인도에서 내내 혼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결국은 하인이자 벗이기도 한 프라이데이와 다시 함께 모험을 떠날 것인데도 애써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즉 개인은 결코 홀로 고립된 비연고적이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인이라는 관념이 역사적으로 절대왕정이라는 지배질서에 저항한 근대 시민 ‘계급’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생성·확산·정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개인은 기본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집합적 주체’가 낳은 존재이다. 더군다나 시민계급이 ‘혁명’을 통해 추구한 것은 여성과 유색인종과 하층 민중 등을 고려치 않아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계급의 인간적 존엄성과 행복추구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사회적 ‘질서’, 즉 헌정체제였다. 이 질서에서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주체의 이름이 바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다. 헌정체제가 자리잡아가면서 공교육, 공공일자리, 공공의료, 공공주택 제도들이 도입, 실시되어왔다. 그러한 제도들을 통해야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교육, 일자리, 의료, 주거 환경 등의 문제는 홀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초해 고안한 주체 형태가 개인인 것이다. 근대 시민 계급의 헌정 사상과 제도를 ‘인권과 복지’로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이유도 그런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 역시 개인이 홀로주체·과잉주체·결핍된 주체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단 두 개념 모두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우선 평등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며 모든 인간이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동등하다는 관점에 기초해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요한 건 단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원리’에 대한 인정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을 실제 그리 대해야 한다는 규범의 실천과 실현이다. 서로에 대해서도 그렇고 개인을 압살하는 질서에 대해서도 방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자유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예속되지 않을, 노예이지 않을 권리와 자격을 의미한다. 어원상 라틴계에서 온 리버레이션/리버티(liberation/liberty)가 특히 그런 의미를 지닌다. 튜턴계에서 온 프리덤(freedom)은 자유민의 가족과 일족에 대해 사용되어 노예가 아니어서 ‘귀중한’(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로서 서로 예속의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게 자유의 의미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공적 이성을 발휘해 구현해야 할 보편적 관계의 질서와 규범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 자유로움이 아닌 피로감만 느끼는 건 우리네 삶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삶, 즉 진짜 개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시 홀로 생존의 정글에 나가 서로 차별하는 질서에 순종하며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 대출원금과 이자 그리고 아이들의 사교육비 마련 등으로 순가처분 소득 대비 200%(OECD 2021년 기준)에 달하는 가계부채를 감당하려면 그리 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체란 바로 그런 자유와 평등의 구현과 같은 ‘대의에 함께 투신하는 자들’(the subject)을 가리킨다. 하지만 작금의 개인은 그런 주체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또 실제 그리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가? 앞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대답은 “아니요”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기껏해야 재산소유자(자산보유자)이거나 소비자이거나 피고용자이다. 혹은 그 셋 다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현실 정치(학)에서는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으로 볼 수 없는데도 개인으로 취급한다. 1인1표라는 제도하에서의 유권자로 부르며 그리 간주한다. 실은 유권자들은 개인이 아닌 득표(가능) 수로 계산할 대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념, 성, 세대, 지역, 계층 등을 구획선으로 해 갈기갈기 찢어 놓고 표를 줄 이들을 추려내려고 할 뿐이다. 즉 현실 정치(학)는 시민집단과 그것에 바탕을 둔 개인이 아닌 지지자 집단만을 뽑아내려고 한다.
만약 새 정치적 주체를
진정 찾고자 한다면
사람들을 ‘진짜 개인’으로
복원해 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인간적 삶 추구할 기본적 여건 필요
최근 새로운 정치 주체 찾기 논의가 한창이다. 현실 정치(세력) 모두가 엉망이어서 생겨난 현상이다. 새로운 정치 주체 논의는 대체로 세대교체론이 주를 이룬다. 가령 86세대의 97세대로의 대체론 혹은 청년정치론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정치적 주체가 될 세대가 따로 있는지 의문이다. 거의 모든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개인이지 못한 개인의 삶, 홀로주체·과잉주체·결핍의 주체의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찾고자 한다면 사람들을 ‘진짜 개인’으로 복원해 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게 해줘야 하고, 인간적 삶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본적 여건을 제공해줘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공적 이성과 용기와 창의성의 온전한 발휘를 기대할 수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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