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 "정책정당의 아들"일 수는 없는가?
한국 대통령제의 가장 결정적인 정책행위자는 대통령과 그 비서실이다. 정당과 국회는 정책 형성의 주체는커녕 최종 결정 단계에서 찬반투표 정도를 행사하는 데 그친다. 집권 때 이행해야 할 국가 비전과 주요 정책의제를 일상적으로 논의하거나 갖춰놓은 정당은 거의 볼 수 없다. 한국의 대통령은 “정당의 비전과 핵심 정책을 실현하는 정당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은 ‘핫이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언론의 화젯거리다. 때로는 논쟁과 갈등을 유발한다. 특히 그의 ‘말’은 정책을 이끈다. 그가 언급한 의제는 순식간에 정부의 핵심 공공의제가 되어 조직(행정부)을 움직이고 돈(예산)도 뒤따르게 한다. 이처럼 대통령은 가장 강력한 어젠다 세터(agenda setter·의제 설정자), 즉 최고의 정책의제 제기자이자 동시에 결정자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통치 행위이자 정책 행위다. 따라서 그가 어떤 의제에 국가 역량의 우선순위를 두느냐는 당대 시민의 삶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대한민국 정치와 정책생태계에서 대통령이 갖는 이런 영향력이야말로 우리가 그의 ‘말’과 움직임을 주목하는 이유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가 지난 8월23일, 출근길 기자들과의 약식문답에서 ‘수원 세 모녀의 비극’을 언급하고, 이후 서울 종로구 창신2동의 빈곤 가정을 찾아 ‘사각지대 발굴’을 강조하자, 국무총리실과 보건복지부 등 관련 정부 기관에서 곧바로 대책 수립에 나서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윤 대통령의 말과 움직임이 대통령실의 의도된 기획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 파워다. 다만, 그가 ‘수원 세 모녀’의 죽음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좋았으나, 정책결정자로서 복지발굴 시스템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정책 소통을 보여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했다. 즉 삶이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극단적 선택이 발생할 때마다 ‘발굴 시스템’을 강화해왔는데도 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지를 두고 좀 더 깊고 넓은 정책 소통을 했더라면 이번만큼은 정부 대책이 좀 더 달라질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를 해봄 직했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못한 듯하다.
이유는 명확하다. 발굴 강화에 초점을 둔 정책 대응으로는 윤 행정부가 강조하는 ‘약자복지’조차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 복지전달 체계의 허점을 섬세하게 살피고, 가난을 배제하는 제도의 흠결을 뜯어고치는 ‘제도 개혁’, 그리고 적정 예산과 인력의 뒷받침 없이는 윤 대통령이 언급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지적해온 바다. 대통령의 정책 이해와 감수성, 정책 소통의 높낮이는 시민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반뼘 혹은 한뼘 더 진전시킬 수 있거나 때로는 획기적으로 풀어내게끔 할 수 있다. 우리가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 반뼘 혹은 한뼘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공무원의 일상적 영역에서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 바람직한 통치는 극단적 어려움에 부닥친 시민의 절박한 욕구(Needs)나 저출산 고령화나 불평등 같은 당대의 난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는 것, 더불어 국가와 공동체가 직면하는 기후위기 같은 실존적 위험을 사전에 포착해 미리 대비하는 것일 게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이 가장 중시해야 할 사항은 무엇보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란 국가 비전과 공동체의 난제를 해결하고 위험에 대비하는 정책의제와 로드맵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의 권한은 이를 행사할 때 모름지기 빛난다.
이런 소명은 진보 대통령이든, 보수 대통령이든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대통령이란 최고 권력을 잡는 것, 즉 집권이 목표였고 이를 위해 고군분투는 했어도, 정작 대통령이 된 뒤에 수행할 국가 비전과 정책의제 등 국정운영 계획 마련에는 소홀했다. 대통령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시선 또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집중되었지, 그가 ‘어떤 비전과 정책의제를 우선시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지난 20대 대선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 선거 과정을 떠올려보자. 여야 거대 정당의 대선 후보마다 정치인들이 참여한 정책본부와 수많은 전문가, 학자 등이 참여하는 매머드급 ‘캠프’가 운영됐지만, 시민이 기억하는 국정 비전이나 각인된 정책의제가 별로 없다. 특히 지난 3월의 대선은 최악이었다.
대통령학 전문가들이나 국정에 참여한 이들은 한결같이 이 점을 대통령의 좌절 또는 실패의 가장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대선 과정이나 임기 초 한껏 떠올랐던 기대가 집권 이후 급격히 실망으로 바뀌는 과정이 5년마다 반복되는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 비전과 정책의제가 명확하지 않으니 국정운영은 임기 초부터 제 길을 잃고 오락가락하고, 인사와 국정 현안을 두고서도 뚜렷한 방향이 없으니 자의적인 권력행사나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은 ‘권력의 사인화(私人化)’란 덫에 쉽게 빠지기 일쑤라는 지적이다. 이는 많은 대통령을 불행으로 이끌게 했다.
대한민국 시민은 정부 수립 이후 12명의 대통령 통치를 겪었다. 이승만이 1~3대, 박정희가 5~9대, 전두환이 11~12대 대통령을 연임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5년 단임제’로 바뀐 뒤로도 8명의 대통령을 마주했다. 윤석열 현 대통령은 13번째 20대다.
이들 대통령에 대한 시민의 평가는 진영과 지역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위대한 대통령”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못난 대통령”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이런 평가를 극단화한다. 미디어를 비롯해 시중에 소비되는 대통령에 관한 담론은 대체로 긍정보다 부정, 성공보다는 좌절 또는 실패가 강하다.
대통령 관련 책을 낸 저자들은 “나라는 선진국인데, 대통령은 왜 그리 영원한 후진국인 걸까”(김종인), “우리나라는 세계사의 귀감이라 할 만한 발전을 이뤘는데 불구하고 대통령의 말로는 하나같이 불행할까요”(허태회)라고 묻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도 생전에 “성공한 역사는 있고, 성공한 대통령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제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며 개헌을 부르짖기도 했다.
좌절과 실패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다양하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원인이라며, 그 “종언”을 외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의 “낮은 입법 성과로 보건대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다”(신현기)라는 반론도 있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함성득), 즉 권위주의적 리더십에서 원인을 찾는가 하면,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겪어야 할 업보”(진영재)라며 단순다수대표제가 문제란 시각도 나온다. 숫제 “실패라고 할 수 없다”(박명림)며 실패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유와 접근 방식이 어떻든 대통령의 국정운영 리더십, 나아가 87년 헌정체제가 낳은 현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효능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재검토하며, 어떤 방향으로 개혁할 것인가다.
이 난제의 정치개혁은 궁극에 정치권이 답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깜냥으로는 이 난제와 관련해 정책생태계 관점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보탤 뿐이다. 대통령만이 아닌 정당 등 여러 정책참여자들의 역할과 권력관계를 동태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복지 선진국인 유럽의 의원내각제 나라에선 정책 형성의 주체는 정당이다. 예컨대 스웨덴에서는 “문제 제기부터 정책 논의, 최종 정책 결정의 주체는 정당”(신광영)이다. 정당은 선거에서 정책 꾸러미를 제시하고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 집권한다. 이렇게 집권한 정당은 내각을 구성해 정책을 집행한다. 행정은 당이 내민 정책을 구체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정당은 당내 합의에 따른 대강의 자체 정책안을 선거와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제는 전혀 다른 정책생태계를 지닌다. 가장 결정적인 정책행위자는 대통령과 그 비서실이다. 정당과 국회는 정책 형성의 주체는커녕 최종 결정 단계에서 찬반투표 정도를 행사하는 데 그친다. 집권 때 이행해야 할 국가 비전과 주요 정책의제를 일상적으로 논의하거나 갖춰놓은 정당은 거의 볼 수 없다. 한국의 대통령은 “정당의 비전과 핵심 정책을 실현하는 정당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이해는 바람직한 정책생태계를 위해서는 대통령만이 아닌 정당과 국회의 역할 또는 이들의 상호관계까지 넓혀 고민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정치체제만 바꾼다고 더 나은 정치와 정책생태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작은 복지국가’인 우리의 실정에 어떤 정치체제가 문제 해결을 위한 더 나은 정책생태계를 형성하게 할지에 대한 깊은 논의와 탐색이 선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관심이 많다. <한겨레>에서 기동취재팀장, 지역편집장(전국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편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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