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추석'이 지나고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김경욱 | 스페셜콘텐츠부장
‘잔인한 추석’이었다. 태풍 ‘힌남노’로 경북 포항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고립돼 숨진 7명의 발인식이 지난 8~9일 엄수됐다. 많은 이들이 추석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귀향길에 오를 때, 이들의 유가족은 깊은 절망의 늪에서 시름겨워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만 아니었다면, 이들의 명절 표정도 여느 가족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는 깊고 선명했으며, 가혹했다.
포항에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6일 새벽의 한 가족을 생각한다. 인근 하천에서 범람한 물이 순식간에 지하주차장을 덮쳤을 때, 자신을 포기하면서도 아들만큼은 살리려고 했던 어머니와 그런 엄마를 홀로 남겨두고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을 중학생 아들을. 그리고 고립된 아내와 아들에게 닿을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마음만 졸였을 아버지를 말이다.
그날 새벽 엄마를 따라나선 중학생 아들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사춘기를 겪어본 세상의 아들들은 안다. 잠 많고, 친구들과 노는 것 빼고는 모든 게 귀찮은 사춘기 중학생이 새벽에 엄마를 따라나선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침수 우려가 있으니 차를 옮기라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안내방송에 지하주차장으로 향한 엄마와 동행한 그 아이의 행동에는 평소 엄마를 어떻게 대해왔고 염려해왔는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하천에서 범람한 물이 순식간에 지하주차장을 덮치고, 이들 모자의 삶을 강하게 압박해올 때, 엄마의 선택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들을 돌려세우는 일이었다.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어깨가 불편했던 자신이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은 급속도로 차오르고, 엄마를 업고 헤엄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는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망과 비탄 속에서도 아이는 엄마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그는 출구 쪽으로 나아갔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아들만큼은 반드시 살리고자 했던 엄마는 그곳에서 14시간을 버틴 끝에 구조된다. 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난 아파트에서 6명, 인근 다른 아파트에서 1명 등 모두 7명이 그날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러 갔다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참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가정’이 꼬리를 문다. 일정량 이상의 비가 오기 시작한 뒤에는 지하주차장 출입을 막는 매뉴얼이 마련돼 있었다면, 그래서 그 시각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주민들에게 ‘차를 옮기라’가 아니라 지하주차장 출입을 금지하는 안내방송을 했다면 어땠을까. 주차장 입구 물막이벽(차수벽)과 주차장 내부 배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면? ‘재난문자’만 보낸 포항시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과 한달 전 이런 일을 겪었다.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지난달 서초구의 한 빌딩 지하주차장에서 한 남성이 빗물에 휩쓸려 실종된 뒤 숨진 채 발견됐다. 지하주차장은 아니었지만, 지난달 8일 관악구에서는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면서 그곳에 살던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6년 태풍 ‘차바’ 때도, 2003년 태풍 ‘매미’ 때도 지하주차장에서 똑같은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지하 공간 침수로 7명이 희생된 것이다. 재해에서 비롯된 이번 참사가 인재인 이유다.
문제는 기후변화 영향으로 앞으로 재해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도 세질 것이라는 점이다. 기상청 산하 국가태풍센터 한 연구관의 분석을 보면, ‘초강력’ 등급(중심 풍속 초속 54m 이상) 태풍의 발생 건수는 1990년대 연평균 1.4개였으나, 2010년대 3.4개로 배 이상 늘었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지목하고 있다. 힌남노가 강한 세력을 유지한 채 한반도에 상륙할 수 있었던 배경도 기후변화로 바닷물 온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결국 ‘사람’이 원인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재해가 재난대책 부재와 맞물려 우리를 위협한다. 이는 먼 나라,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둑을 쌓고 배수시설과 경보시스템을 갖추는 것만큼,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후위기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또 우리의 이웃과 아이를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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