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간] ⑥ 천사마을의 '마당발 통장 할매'.."귀 열고 움직여라"

홍인철 2022. 9. 1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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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묶인 삶'에 회의..40년 운영한 가게 접고 '나와 이웃'에 집중
60대에 중·고등·대학 졸업한 만학도..통장 맡아 복지사각지대 발굴
평생 학습하는 김영순씨 [김영순씨 제공]

[※ 편집자 주 =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 역시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천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연합뉴스는 노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위해 개인과 사회,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15편에 걸쳐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①∼④편은 한국 노인의 실상과 실태를, ⑤∼⑩편은 공동체에 이바지한 노인들을, ⑪∼⑮편은 선배시민 운동과 과제 등을 싣는다.]

(전주=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영순아, 너는 무슨 재미로 사니?"

내가 나에게 묻는다.

북적이던 가게 문을 닫은 뒤 밀려온 공허함을 달래느라 혼자 술을 마신다.

'돈에 인생이 묶인 듯 평생 내 삶이 없었다'는 생각이 말뚝에 박힌 조랑말처럼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환갑 즈음에 불현듯 찾아온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새벽녘까지 뒤척이던 영순씨는 40년 동안 지켜온 가게를 접기로 한다.

생애 주기 (PG) [양온하 제작] 일러스트

김영순(75·전북 전주)씨는 1948년에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다.

경찰인 아버지(당시 34세)는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에 총살당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영순씨는 어머니와 함께 큰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약방을 운영한 큰아버지는 머슴들을 부릴 정도로 부자였다.

하지만 "여자가 배워서 뭐 하겠느냐"며 영순씨의 초등학교 입학을 반대했다.

장사하던 어머니의 고집으로 겨우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중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동네 또래들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느질과 가위질을 배웠다.

양장점을 거치며 익힌 기술로 20대에 가게를 차렸고, 결혼도 해서 1남 1녀를 뒀다.

그렇게 시작한 '키티 의상실'을 '천사마을'인 전주 노송동에서 30년 넘게 운영했다.

전주 노송동 '천사 날개' 제막식 [전주시 제공]

노송동은 익명의 '천사'가 2000년부터 매년 성탄절에 수천만원을 놓고 사라져 작년까지 8억원이 넘는 성금이 쌓였다. 이 동네가 '천사 마을'로 불리는 이유다.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영순씨의 의상실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으니 밤샘 작업은 다반사였다.

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교복 옷감이 산처럼 쌓였고, 약혼자들이 웨딩드레스를 수시로 주문했다"고 떠올렸다.

1983년 교복 자율화 시행으로 전국의 의상실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문전성시를 이루던 영순씨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님이 급격히 줄어 생계가 곤란해지자 친구 권유로 인근의 노래방을 인수해 운영했다.

그는 "노래방 호황기여서 돈도 제법 벌었지만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100세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상태로 한참이 흐른 뒤 문득 그의 머리를 스치는 짧지만 강렬한 처방전이 나왔다.

'남들 다 가는 중학교를 나오지 못했구나. 영순아, 학교 가자'

남편에게 "가게를 정리하고 이제부터 공부할 거예요"라고 선언하고 곧장 학교를 알아봤다.

환갑을 앞둔 나이였지만 성인 여성 배움터이자 일반 학교와 동일 학력을 인정받는 전북도립여성중고등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30명을 모집하는 중학교 과정은 학비 면제와 함께 자격증 취득이나 상급 학교 진학 등을 할 수 있어 만학의 꿈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교복 입은 만학도 김영순씨 [김영순씨 제공]

6년간 공부에만 매달려 중학교, 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하는 동안 지금도 '오빠'라고 부르는 네 살 위의 남편이 살림을 돌봤다.

영순씨는 "그때 청춘이 다시 시작됐다"며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도 사소한 일에도 마치 간지럼타듯 동급생들과 깔깔대며 웃느라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몰랐다. 학교란 참 이상한 곳이었고 제2의 인생이 열렸다"고 회상했다.

특히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는 아이들처럼 좋기도 했고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한(恨)이 밀려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다시 생업에 복귀할지, 대학 진학을 해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입학은 물론 고난도의 학업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대학은 정원 미달인 곳이 많다"는 친구의 솔깃한 말에 또 한 번 용기를 냈다.

전주비전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한 그녀는 65세 때인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열흘간 자원봉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 세계적인 행사에서 손자뻘인 전국의 대학생들과 봉사활동을 한 것이 스스로 대견하고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사회복지사, 어린이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호스피스, 미술치료, 레크리에이션 강사 등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격증을 잇달아 취득, 다양한 봉사활동에 나서 여러 개의 봉사상을 타기도 했다.

봉사상 받는 김영순씨 [김영순씨 제공]

70세가 넘었음에도 얼마 전에는 젊은 사람들과 당당히 경쟁해 노송동 '37통 통장'에 합격,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고 횡단보도 앞에서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차량을 통제하는 일 등으로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특히 같은 동네에서 반백 년을 살아 이른바 '마당발'로 통하는 그는 소외이웃 발굴에도 열심이다.

투병과 생활고에도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송파 세 모녀와 수원 세 모녀 같은 비극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시청 관계자는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가정을 찾기 어려운데, 동네 상황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김씨 할머니 같은 마당발들이 나서면서 굶거나 외로움 등으로 방치되는 이웃이 확 줄었다"고 귀띔했다.

영순씨는 "정부나 시청에서 다양한 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을 구석구석을 잘 아는 동네 토박이 노인들이 좀 더 촘촘하게 파고들면 이웃이 이웃을 돕는 자발적인 문화가 확산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폐지를 줍든, 노점을 하든, 식당을 하든 돈과 시간에 쫓겨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지 않으면 나이 듦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며 "젊은이를 비롯한 주변의 말에 귀를 활짝 열고 공동체를 위해 뭔가를 한다면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활짝 웃는 김영순씨 [촬영 홍인철]

그는 "10여 년 전에 누군가 100세까지 산다고 하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이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말이 실감난다"면서 "의상실을 다시 차려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존엄성을 가지고 살고, 남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실천하려 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또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빼더라도 국민연금과 통장수당, 노인 일자리 임금, 노인 수당 등을 합하면 매달 100만원 가량의 수입이 생겨 종종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거나 가끔은 삼겹살에 소주도 즐긴다고 한다.

이정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과장은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활동적 자원봉사를 하는 김 할머니는 공동체에서 받은 유무형의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건강에 집중하고 여가만 신경 쓰던 평범한 노인들이 이제는 돌봄의 대상을 넘어 돌봄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선배'"라고 덧붙였다.

ic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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