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오늘도 밥상에 올랐다, 이주노동자의 눈물이
전국에 폭염특보가 내려졌던 지난달 초, 비닐하우스 안 빼곡히 자란 작물들 사이로 농약을 치던 한 이주노동자 모습이 담긴 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농약을 뿌리는 이주노동자는 얇은 면 마스크 하나만 쓴 상태였습니다. 저대로라면 코와 입과 피부로 농약이 스며드는 게 당연해 보였습니다. 수도권 주민 밥상에 오르는 신선 채소가 집중 재배되는 경기 포천의 비닐하우스 단지를 찾아갔습니다.
부족한 일손에 더 많이 뿌리는 농약…스카프로 입만 겨우 가려
일손이 부족해진 농촌에선 더 많은 농약을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빡빡한 인력 사정에 잡풀이 자랄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섭니다. 과연 누가, 얼마나 농약을 뿌리고 있을까. 농장주 눈을 피해 마을을 누비던 중 농약 살포 준비를 하는 이주노동자 2명을 만났습니다. 각각 캄보디아와 네팔에서 온 노동자였습니다. 파종 작업을 끝낸 터라 비닐하우스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농약을 뿌렸는데, 가까이만 가도 약 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왔습니다. 역시나 방독마스크 없이 농약을 뿌리고 있었는데, 지난 여름엔 하루에 한 번은 농약을 꼭 뿌렸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들도 영상 속 이주노동자처럼 코와 입으로 농약을 마시며 일했을 겁니다.
"지금 사실 농촌에 가든지 어촌에 가면 가장 궂은 일은 이주노동자들이 거의 다 감당하고 있습니다. 채소농장의 경우 밀폐된 공간에서 농약 뿌리는 일을 내국인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너무 일이 바쁠 경우 고용주나 고용주 가족이 임시로 어쩌다 한 번 하는 건 봅니다. 그러나 내국인 노동자가 농약 살포를 전담하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한국인한테 그 일(농약 살포)을 시킨다면 하루에 한 30만 원 일당 줘도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너무 고되거든요."
사실 산업안전보건법에도 농약을 뿌릴 때 방독마스크를 지급하라는 못 박은 규정은 없습니다. 산안법상 '관리나 허가 대상 유해 물질'의 경우 보호구를 지급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농약의 경우 다양한 물질의 혼합제여서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농약 일반에 대해선 안전보건공단 지침으로 보호구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법률상 처벌이나 제재의 근거가 되지 않아서 지켜지지 않습니다. 대다수 내국인 농민도 농약 살포 시 방독마스크를 써야한다는 인식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주노동에 기대고 있는 농업 현실에 비춰볼 때, 농약 살포 노동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집중돼 있다는 건 곱씹어볼 부분입니다. 건강 진단을 받기도 어려운 이주노동자에게 어떤 유해 물질이 담겼는지도 알 수 없는 농약을 뿌리게 했다면 최소한의 보호구라도 지급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대부분 20~30대 젊은 층인 이주노동자들이 나이가 들면서 어떤 건강상의 피해가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6년 동안 농약 살포 작업을 해온 네팔 출신 노동자가 지난해 무정자증 판정을 받고 본국으로 귀국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과연 이 네팔인 노동자 한 명만의 문제일까요?
설령 방독마스크를 지급해도 농장주 눈치가 보여서 착용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보호구를 착용하면 호흡 부담이 커지고 땀이 더 많이 나서 휴게 시간을 더 자주 가져야 하는데 이런 여건이 제대로 갖춰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일환경건강센터의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이주노동자들의 농약 사용 실태 조사가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내국인 농민에 대한 조사는 부족하게나마 이뤄진 적이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는 전무합니다. 농장주와 노동자 모두 보호구 착용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부나 농진청이 적극 나서 이들의 인식 수준을 높이고 보호구 제공 의무에 대해 감독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끔 장을 볼 때면 특히 신선 채소 고르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국내산이라고 적힌 채소들, 농민이 한아름 수확한 작물을 들고 있는 사진이 붙은 상품을 고를 때면 왠지 모르게 착한 소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덤으로 따라왔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난 다음부턴 밥상에 오르는 애호박과 상추, 오이와 열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은 건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이 깊이 배어 있는 채소일 테니까요.
제희원 기자jess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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