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로 책 싸서 다닌 철학자, 尹정부 위기 컨트롤타워를 맡다 [김인엽의 대통령실 사람들]
뉴라이트 진영에서 활동한 '보수의 지략가'
김문수 정무특보, MB 정무수석실 등 근무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 '국정상황실' 맡아
태풍 하루 만에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일조
정치철학 조예 깊은 정치권 대표 다독가
역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은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맡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정상황실장은 '문재인의 복심'이라 불렸던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정상황실장은 '좌희정 우광재'라고 불렸던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과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호철 전 민정수석이 맡았습니다. 국정상황실을 처음으로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초대 국정상황실장에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을 임명했습니다.
국정상황실장이 요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국정상황실이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각종 정보의 중추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상황실은 재난재해·안보·치안·경제 위기 시 정부 간 업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평상시에는 민·관의 정보를 취합해 위험요소를 사전에 감지합니다. 위기 대응을 위한 대통령의 행보나 메시지도 관리해야합니다. 단순 위기대응 능력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정무감각까지 갖춰야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 정권 최초로 이 국정상황실을 존치시켰고, 한오섭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을 국정상황실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보수의 지략가, 김병준의 남자 … '尹 메시지 담당'으로
윤 대통령에게 한 실장을 소개한 사람은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입니다. 한 실장은 정치권에서 '김병준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있었습니다. 한 실장은 2018년7월부터 약 8개월 간 김 전 위원장의 비서실 부실장으로 근무했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세종을 후보로 나선 그를 도왔습니다.
한 실장이 윤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윤 대통령이 정치도전을 선언했을 때 즈음입니다. 윤 대통령은 여러 정치권 원로들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 중에는 김 전 위원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 전 위원장은 "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사람이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개 지지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윤 대통령에게 추천한 인물이 바로 한 실장입니다.
한 실장이 윤석열 캠프에 합류해 맡은 업무는 '메시지 관리' 였습니다. 십수년 정치권에서 단련된 그의 정무 역량을 주목한 것입니다. 한 실장은 2000년대 뉴라이트 전국연합 기획실장을 맡으며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른바 '운동권'이었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사상을 전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 실장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정무특보, 이명박 청와대 정무수석실 선임행정관 등을 맡아 보수 진영의 지략가로 활동했습니다.
"홍(준표) 선배님, 우리 깐부 아닌가요"
한 실장이 윤 대통령에게 제안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지난해 10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당시 홍준표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윤 대통령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묶어 '범죄공동체'라고 비판하자, 윤 대통령이 내놓은 반응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아무리 치열하게 경쟁을 하더라도, 경선이 끝나면 정권교체를 위해 함께 어깨를 걸고 나가야 하는 동지들 아니겠나"며 원팀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이 외에도 홍 후보가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을 겨냥해 "조직은 바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응수한 것 역시 한 실장의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대통령 포항에서 오니 책상에 특별재난지역 선포 서류가"
11호 태풍 한남노가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지난 6일, 한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물바다가 된 포항 시내 한복판에 해병대 소속 장갑차가 나타나 시민들을 구조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군·경을 포함한 온 정부가 태풍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그 전날 "군과 경찰은 지역별로 재난대응기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해 가용인력을 최대한 재난 현장에 즉각 투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같은 지시가 이행되도록 물밑에서 조율한 사람이 바로 한 실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지시를 내리면 한 실장이 이종섭 국방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연락하거나 혹은 반대로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태풍 힌남노에 직격타를 맞은 포항·경주시가 태풍 피해를 입은지 하루 만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데도 한 실장의 대처가 주효했다는 게 대통령실 내부의 전언입니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포항 피해 현장에서 돌아오자 집무실 책상에는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위한 서류가 준비돼있었다"고 전했습니다. 2020년 9월 태풍 하이선으로 강원 삼척시, 경북 영덕군 등 5개 지자체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는 데 9일이 걸렸습니다. 2019년 태풍 미탁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빠져나간 이후 특별재난지역 선포까지는 7일이 소요됐습니다.
지난 달 수도권·충청권 집중호우 당시 윤 대통령이 서초동 자택에서 상황을 지휘한 판단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은 한 실장 및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새벽 3시를 넘어서까지 유·무선으로 상황에 대응했지만 "자택에 고립된 대통령이 도대체 전화통화로 무엇을 점검할 수 있다는 말이냐(조오섭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군주론이 애독서인 '철학자 정치인'
"신문지에 책을 싸서 다니면서 읽는 사람"
한 실장을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인사의 평가입니다. 신문지에 책을 싸고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만큼 책을 소중히 한다는 의미일 수도, 혹은 어떤 책을 읽는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실장은 정치권에서도 다독(多讀)가이자 정치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져있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한 실장을 국정상황실장으로 천거하려하자 그는 거듭 사양했다고 합니다. 당시 단테의 《신곡》을 숙독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 실장은 평소 기자들과도 만나 애독서인 이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을 추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대통령실 사람들'은 용산 시대를 열어가는 윤석열 대통령비서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통령실과 관련해 더욱 다양한 기사를 보시려면 기자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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