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로 책 싸서 다닌 철학자, 尹정부 위기 컨트롤타워를 맡다 [김인엽의 대통령실 사람들]

김인엽 2022. 9. 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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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섭 국정상황실장

뉴라이트 진영에서 활동한 '보수의 지략가'
김문수 정무특보, MB 정무수석실 등 근무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 '국정상황실' 맡아
태풍 하루 만에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일조
정치철학 조예 깊은 정치권 대표 다독가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힌남노 대비상황 점검회의에서 한오섭 국정상황실장으로부터 태풍 힌남노의 진로 등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역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은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맡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정상황실장은 '문재인의 복심'이라 불렸던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정상황실장은 '좌희정 우광재'라고 불렸던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과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호철 전 민정수석이 맡았습니다. 국정상황실을 처음으로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초대 국정상황실장에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을 임명했습니다.

국정상황실장이 요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국정상황실이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각종 정보의 중추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상황실은 재난재해·안보·치안·경제 위기 시 정부 간 업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평상시에는 민·관의 정보를 취합해 위험요소를 사전에 감지합니다. 위기 대응을 위한 대통령의 행보나 메시지도 관리해야합니다. 단순 위기대응 능력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정무감각까지 갖춰야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 정권 최초로 이 국정상황실을 존치시켰고, 한오섭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을 국정상황실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보수의 지략가, 김병준의 남자 … '尹 메시지 담당'으로

윤 대통령에게 한 실장을 소개한 사람은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입니다. 한 실장은 정치권에서 '김병준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있었습니다. 한 실장은 2018년7월부터 약 8개월 간 김 전 위원장의 비서실 부실장으로 근무했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세종을 후보로 나선 그를 도왔습니다.

한 실장이 윤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윤 대통령이 정치도전을 선언했을 때 즈음입니다. 윤 대통령은 여러 정치권 원로들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 중에는 김 전 위원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 전 위원장은 "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사람이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개 지지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윤 대통령에게 추천한 인물이 바로 한 실장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1월29일 김병준 전 국민의힘 상임선대위원장과 함께 세종시 밀마루 전망대를 방문해 행정중심복합도시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한 실장이 윤석열 캠프에 합류해 맡은 업무는 '메시지 관리' 였습니다. 십수년 정치권에서 단련된 그의 정무 역량을 주목한 것입니다. 한 실장은 2000년대 뉴라이트 전국연합 기획실장을 맡으며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른바 '운동권'이었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사상을 전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 실장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정무특보, 이명박 청와대 정무수석실 선임행정관 등을 맡아 보수 진영의 지략가로 활동했습니다. 

"홍(준표) 선배님, 우리 깐부 아닌가요"
 한 실장이 윤 대통령에게 제안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지난해 10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당시 홍준표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윤 대통령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묶어 '범죄공동체'라고 비판하자, 윤 대통령이 내놓은 반응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아무리 치열하게 경쟁을 하더라도, 경선이 끝나면 정권교체를 위해 함께 어깨를 걸고 나가야 하는 동지들 아니겠나"며 원팀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이 외에도 홍 후보가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을 겨냥해 "조직은 바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응수한 것 역시 한 실장의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대통령 포항에서 오니 책상에 특별재난지역 선포 서류가"

지난 6일 해병대 1사단 소속 한 상륙돌격장갑차에 탄 대원들이 포항 시내에서 태풍 힌남노로 고립된 시민을 구조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11호 태풍 한남노가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지난 6일, 한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물바다가 된 포항 시내 한복판에 해병대 소속 장갑차가 나타나 시민들을 구조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군·경을 포함한 온 정부가 태풍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그 전날 "군과 경찰은 지역별로 재난대응기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해 가용인력을 최대한 재난 현장에 즉각 투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같은 지시가 이행되도록 물밑에서 조율한 사람이 바로 한 실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지시를 내리면 한 실장이 이종섭 국방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연락하거나 혹은 반대로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태풍 힌남노에 직격타를 맞은 포항·경주시가 태풍 피해를 입은지 하루 만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데도 한 실장의 대처가 주효했다는 게 대통령실 내부의 전언입니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포항 피해 현장에서 돌아오자 집무실 책상에는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위한 서류가 준비돼있었다"고 전했습니다. 2020년 9월 태풍 하이선으로 강원 삼척시, 경북 영덕군 등 5개 지자체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는 데 9일이 걸렸습니다. 2019년 태풍 미탁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빠져나간 이후 특별재난지역 선포까지는 7일이 소요됐습니다.

지난 달 수도권·충청권 집중호우 당시 윤 대통령이 서초동 자택에서 상황을 지휘한 판단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은 한 실장 및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새벽 3시를 넘어서까지 유·무선으로 상황에 대응했지만 "자택에 고립된 대통령이 도대체 전화통화로 무엇을 점검할 수 있다는 말이냐(조오섭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군주론이 애독서인 '철학자 정치인'

"신문지에 책을 싸서 다니면서 읽는 사람"

한 실장을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인사의 평가입니다. 신문지에 책을 싸고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만큼 책을 소중히 한다는 의미일 수도, 혹은 어떤 책을 읽는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실장은 정치권에서도 다독(多讀)가이자 정치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져있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한 실장을 국정상황실장으로 천거하려하자 그는 거듭 사양했다고 합니다. 당시 단테의 《신곡》을 숙독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 실장은 평소 기자들과도 만나 애독서인 이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을 추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대통령실 사람들'은 용산 시대를 열어가는 윤석열 대통령비서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통령실과 관련해 더욱 다양한 기사를 보시려면 기자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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