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르포] 여왕 말만 꺼내도 눈물..찰스 3세 버킹엄궁 첫 등장에 환호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로 구호 변화.."슬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날"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여왕 얘기하려고 하면 이렇게 바로 눈물이 나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다음 날인 9일(현지시간) 버킹엄궁 앞에 꽃다발과 편지를 들고 친구와 온 마거릿(67)씨는 여왕에 관해 말을 꺼내자마자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다.
그는 "정말 훌륭한 분이었고, 버킹엄궁 발코니에 선 여왕을 더 못 본다고 생각하니 믿을 수가 없다"며 "손자·손녀들과 같이 편지를 써왔다"고 말했다.
함께 온 말린(68)씨의 편지엔 본인 어머니 얘기가 담겼다. 그는 "어머니가 여왕보다 한 살 더 많았고 젊었을 때 곁에서 일했다"며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기도 해서 어제 온종일 울었다"고 말했다.
버킹엄궁 앞에는 여왕 서거가 발표된 직후인 전날 밤보다 추모 인파가 훨씬 더 늘어나서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야 했다. 오전에는 한참 먼 곳까지 길게 줄이 늘어섰다.
부모들은 어린아이들 손을 잡거나 목말을 태워 오고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들렀다. 런던 밖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옥스퍼드에서 기차로 20세 아들과 함께 온 로버트(60)씨는 "평생 봐 온 나의 여왕이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픈 유니버시티(방통대) 음악 강사인 그는 "민주주의와 결합한 영국 군주제는 좋은 정치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손에 꽃을 든 레티씨는 여왕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동생과 함께 인사를 하려고 왔다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후 1시가 되자 주변 하이드파크 등에서 쏘는 예포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예포는 여왕 나이만큼 96발이었다.
이어 경찰이 접근을 통제하고 버킹엄궁 정문을 열자 애도는 설렘으로 변했다.
버킹엄궁의 새 주인인 국왕 찰스 3세의 등장을 짐작한 사람들은 스타를 기다리듯 일제히 스마트폰을 치켜들었다.
하늘에 헬기들이 타타타 소리를 내고 맴돌자 분위기가 고조됐고 드디어 밸모럴 성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임종을 지켰던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가 검은 상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환호와 박수가 우렁차게 터졌고 영국 국가인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를 부르거나 구호처럼 힘차게 외쳤다. 국가 제목은 전날 낮까지만 해도 '여왕'이었는데 이제는 '왕'이 됐다.
찰스 3세 부부 입장 전에도 근위병이 '여왕의 경비대'(Queen's Guard)가 아닌 '왕의 경비대'(King's Guard)라고 구령을 붙였다.
누군가 '오, 킹(King)!'이라고 하자 주변에서도 변화를 실감하는 듯 되풀이했다.
국왕 부부는 담장을 따라 걸으며 추모객들과 10분간 악수하고 얘기를 나누고선 궁 안으로 첫발을 디뎠다.
당초엔 추모객들이 담 밑에 놓은 꽃만 들여다보고 갈 예정이었지만 국왕 부부가 즉흥적으로 경비 라인 밖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는 국왕의 뺨이나 손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예상 못 한 접촉에 놀랍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찰스가 왔다"라거나 "커밀라도 있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입에 익지 않은 탓에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전처럼 찰스, 혹은 찰스 왕세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딸을 어깨에 태운 마크씨는 찰스 3세와 악수를 했다면서 "찰스를 좋아하고 새로운 자리에서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 남부 항구도시 포트머스에서 가족이 함께 왔다고 말했다.
찰스 3세는 밸모럴성에서 하루를 보낸 뒤 이날 런던으로 돌아와 버킹엄궁에서 리즈 트러스 총리와 첫 면담을 하고 저녁엔 첫 TV 녹화연설을 내보냈다.
정부 소송 변호 관련 일을 하는 공무원인 댄씨는 "동료와 함께 현장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왔다"며 "찰스 3세가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할지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슬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라며 "군주제는 국가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등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왕이 영국뿐 아니라 세계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만큼 버킹엄궁 앞에는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이 취재 중이었다. 워낙 많다 보니 붙잡고 보면 기자인 경우도 있다.
영국은 말 그대로 국상 중이다. BBC 라디오에는 대부분 느린 음악이 나오고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뿐 아니라 상점 유리창 등에도 여왕의 사진과 추모 메시지가 걸려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가기도 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여왕 서거 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군주제에 모두가 찬성하는 것도 아니고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그렇다. 특히 찰스 3세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 10대 남학생은 "메신저에서 얘기가 나왔는데 대체로 여왕은 좋지만 다른 왕실 인사들은 맘에 안 든다고들 했다"며 "그러다가 아일랜드계 친구가 여왕은 마녀라고 했다가 분위기가 잠시 싸늘해졌다"고 말했다.
SNS에선 왕관에 X자 표시를 한 그림을 프로필에 올리는 이들도 있고 주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 취소에 항의하는 움직임도 있다.
merci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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