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체크K] '심정지'인데 '구조'라고? 구조 뜻도 모르는 언론?

임주현 2022. 9.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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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호 태풍 '힌남노'는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가면서 곳곳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태풍 피해가 막바지에 달했던 지난 6일에는 경북 포항의 아파트 주민들이 지하주차장에 댄 차를 빼러 갔다가 물이 차면서 실종됐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7일) 오전, 각 언론매체들은 실종자 수색 결과와 관련한 기사들을 잇따라 내놓았는데요.

해당 기사 화면 캡처


그런데 이 기사들에 달린 댓글 반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기자가 구조의 뜻도 모르고 엉터리 기사를 썼다"며 비난하는 댓글도 다수 달렸기 때문입니다. 심정지 상태라면 '사망자를 수습했다'고 해야지 어째서 산 사람에게 쓰는 '구조'라는 표현을 썼냐는 겁니다.


사실 이런 반응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올해 초 광주광역시 현대산업개발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때도 사고 발생 사흘 만에 심정지 상태의 실종자가 발견됐다는 기사에 "실종자를 발견한 건지, 사망자를 발견한 건지 헷갈린다"는 취지의 댓글이 다수 달렸습니다. 언론을 향한 비난은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당 기사를 본 누군가가 '사망자를 구조했다'는 표현이 어법상 적절한지를 국립국어원에 묻자 국어원은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인다"면서도 "단정적인 답변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정의에 따르면 '구조'가 '재난 따위를 당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다'는 뜻인만큼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사망자로 이해할 수 있는 '심정지 실종자'에게까지 "구조했다"는 표현을 쓰는 게 다소 어색해 보일 수 있습니다.

출처:국립국어원 온라인 답변


그럼에도 다수의 언론매체들이 심정지된 실종자까지 포함해 굳이 "구조했다"고 보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사망 판정권' 없는 구급대원에겐 심정지자도 '구조' 대상

우선 실종자 수색에 나선 구급대원에게는 원칙적으로 구조자의 사망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망 진단은 의료법에 따라 의사만 할 수 있고 현장 구급대원은 '현장응급처치 표준지침'에 따라 사망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 반드시 의사에게 판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구조자가 심정지 상태라고 해도 인근 병원으로 이송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 보니 소방당국은 구조 상황에서 발견한 심정지자도 "구조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구조 상황을 소방당국의 브리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심정지된 상태로 구조됐다"는 소방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구조 상황이 시시각각 보도되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언론도 섣불리 "사망자를 수습했다"고 보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만 사망 후 사후강직이 일어났거나 부패, 신체가 크게 훼손되는 등 육안으로 봐도 사망이 명백해 보이는 경우에 한해선 현장 구급대원이 사망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오해의 여지없이 즉각 "사망자 발견"이라거나 "사망자 수습"이라는 보도가 나가게 됩니다. 이번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현장에선 구조대가 육안으로 사망을 판정할 수 있는 이런 '예외적 상황'이 없어 "심정지 상태의 실종자들이 구조됐다"는 보도가 나간 겁니다.

아베 피습을 보도한 NHK 기사(2022.07.08.)


재난 보도가 일상화된 일본의 경우도 우리와 비슷한 이유로 '심정지'와 '사망자'를 분류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8일 아베 전 일본 총리가 피습됐을 당시에도 일본 공영방송 NHK는 의료진이 공식 사망을 발표하기 전까지 '심정지'(일본표현은 심폐정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 소생률 10%의 희망, 성급한 보도는 오보 위험↑

이렇게 현장에서 임의로 사망 판정을 내리는 게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기도 하지만 언론이 섣불리 심정지 구조자를 '사망자'로 보도할 경우 오보가 될 수 있다는 위험도 존재합니다. 심정지 환자라고 해도 병원 이송 전후로 소생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일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소방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2016~2020) 간 심정지로 인해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구급대원의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환자 비율이 8~11%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발순환 회복률: 심정지 환자 중 구급처치로 소생한 사람의 비율


소방청과 질병관리청이 공동으로 조사하는 '급성 심장정지 조사' 통계에서는 병원에 이송되기 전 소생하는 비율이 지난 5년간 매년 평균 8% 정도로 나옵니다. 소방당국이 사망 판정을 섣불리 내릴 수 없고 언론에도 그렇게 전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간혹 구급차 안에서 CPR(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의식이 돌아오시는 분도 있고 병원에서 소생하시는 분도 계세요. 때문에 의사의 최종 판단이 더 필요한 측면도 있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 소방청 관계자

실제로 지난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마스크를 사려고 줄 서 있던 70대 노인이 기다리다 쓰러져 사망했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왔는데 알고 보니 오보였던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구조대원이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했다"고 밝힌 것을 일부 기자들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보도한 겁니다. 이후 해당 노인이 생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여러 언론매체에서 정정 보도와 기사삭제가 잇따랐습니다.

소방청은 이후 중형재난 이상에 해당할 경우 출입기자들에게 '심정지 이송' 후 상황을 문자로 알리고 있습니다. 심정지 이송 후 최종적으로 사망했는지, 소생했는지 여부를 알리는 겁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이 모두 후속 기사로 반영되는 건 아닙니다. 소방청 관계자는 "달라진 내용을 후속 보도로 전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 전문가들 "정확한 표현 고민해야"

그래서 적절한 후속 보도와 함께 정확한 표현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소방당국이 '심정지 상태로 이송한다'는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고 해도 언론이 그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 설명해주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심정지된 사람을 구조했다는 표현 자체가 여전히 뉴스 소비자에겐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기자협회가 제정한 보도 준칙들을 봐도 재난 상황에서 희생자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라는 세부적인 규정까지는 돼 있지 않거든요. 그렇다보니 일부 혼동스런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참에 언론이 보다 정확한 표현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재난 상황에서 국민이 갖는 가장 큰 관심사는 결국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정도입니다. 그런 걸 알아야 제대로 된 경각심을 갖고 재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거든요. 때문에 정부와 언론이 해당 내용을 신속·정확하게 제공해야 하는데, 신중한 표현도 좋지만,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직관적이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양측 모두가 효과적인 표현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이연 선문대 명예교수 (한국재난정보미디어포럼 회장)

(인포그래픽: 김서린)

(취재지원:강혜림 SNU팩트체크센터 인턴기자 kangnews.h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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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현 기자 (le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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