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엔 전 말고 애들도 좋아하는 치킨 놓는 게 어때요"
송편·김치·과일 등 6가지 기본에 최대 3가지 추가 권고
"술 대신 커피나 고인 즐겨하던 과자 등도 예법 안 어긋나"
"차례상 가짓수는 상관 없고 가족간 합의·화합이 가장 중요"
지난 5일 부산에서는 추석 음식 준비 문제로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다 흉기를 휘두른 여성 A씨가 불구속 입건됐다. A씨는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중에 다음 명절부터는 차례 음식을 만들지 말자는 취지로 남편 B씨와 얘기하던 끝에 격분해 요리에 사용하던 흉기를 휘둘러 남편에게 상처를 입혔다. 남편 B씨는 70대, A씨는 60대였다.
흉기를 휘두른 것이야 잘못이지만 그동안 A씨가 명절 때마다 받았을 스트레스에 공감한다는 여성들이 많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여성들은 “자기 조상 차례상은 자기가 차려라”,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가 음식을 준비하느냐”, “시댁에 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등의 반응을 보인다. 상당수 여성들에게 명절은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날이다.
평소 남편과 갈등이 심하던 여성은 명절 전후로 고부갈등 등까지 겹쳐 폭발하게 된다. 실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명절 전후로 가족간 다툼이나 이혼율이 증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설 연휴가 있던 2020년 1월 이혼 건수는 직전달 대비 7.38% 늘었다. 당시에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이었다. 추석이 있던 같은 해 10월에는 직전달 대비 0.49% 증가에 그쳤는데 코로나 사태 때문에 시댁에 가지 않거나 차례를 지내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처럼 즐거워야 할 명절이 가족간 갈등을 부르면서 전국 유림을 대표하는 성균관유도회총본부가 자기 반성문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5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차례상 표준화 방안’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영갑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은 “차례는 조상을 사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데 이로 인해 고통받거나 가족 사이의 불화가 초래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최대 스트레스 ‘전 부치기’는 족보에 없는 것
명절 음식 가운데 고생스러운 음식 중 하나는 바로 전(煎)이다. 하지만 전은 전통 예법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성균관측의 설명이다. 기름진 음식에 대한 기록은 김장생 선생의 ‘사계전서’ 제41권 ‘의례문해’에 나오는데 ‘밀과와 유병 등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서술돼 있다고 한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 즉 전이나 부침개를 차례상에 올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차례상 가짓수는 몇 개가 적당할까. 성균관측이 제시한 추석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 나물, 구이(적·炙),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다. 여기에 조금 더 올린다면 육류, 생선, 떡 등 9가지를 놓을 수 있도록 권고했다.
성균관 측은 이번 간소화 방안 발표를 앞두고 지난 7월 28∼31일 20세 이상 일반 국민 1000명과 유림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각각 실시했다. 조사 결과 차례를 지낼 때 사용할 음식의 적당한 가짓수로는 국민 49.8%가 5∼10개, 24.7%가 11∼15개를 꼽았다.
결국은 가족간 합의나 화합이 가장 중요
하지만 차례상 가짓수가 적거나 음식 종류가 달라도 상관 없고 가족들이 서로 합의해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성균관측의 설명이다. 가령 차례상에 술을 전통 차례주 대신 와인이나 커피로 올리거나 물을 술잔에 채워 상차림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것이다. 또 고인의 살아 생전에 즐겨 드시던 밥과 김치, 토마토, 과자 등으로 차례상을 차려도 예법이나 격식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성균관측은 “술은 모든 음식의 정수(精髓·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음식)라서 술을 올리시는 것을 권장한다”면서도 “기제사와 같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정성으로 차례상을 준비하신다면 뜻풀이 그대로 술 대신 찻물을 올려도 좋고 정화수도 술 대신 올려도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테이블 위에 사과·배·감과 송편 등 3~4가지 음식만으로 차례상을 차려도 좋다고 조언했다.
이 밖에 조상의 위치나 관계 등을 적은 지방(紙榜) 외에 조상의 사진을 두고 제사를 지내도 되며, 차례와 성묘의 선후(先後)는 가족이 의논해서 정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또 그동안 차례상을 바르게 차리는 예법처럼 여겨왔던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조율이시(棗栗梨枾·대추·밤·배·감)’는 예법 관련 옛 문헌에는 없는 표현으로, 상을 차릴 때 음식을 편하게 놓으면 된다고 했다.
유림도 간소화 찬성 많아
눈에 띄는 점은 전통을 중시하는 유림에서도 간소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설문 조사에서 차례상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유림의 응답은 41.8%로, 일반 국민의 40.7%보다 소폭 높게 나왔다. 최 위원장은 “이번 간소화 방안에 대해 대부분의 유림이 찬성했고 반대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름난 종가에서도 화려한 차례상이 점차 사라지는 실정이다.
다만 최 위원장은 일반 국민의 차례나 제사와 달리 점차 맥이 끊겨가는 종가(宗家) 제사와 같은 전통은 국가 차원에서 보존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종가의 불천위(不遷位) 등은 일종의 무형 문화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불천위는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높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가 허락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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