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이 비난했던 기본소득, 실제 해보니 삶이 달라졌다 [소셜 코리아]

이원재 입력 2022. 9. 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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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의 기본소득제 실험.. 다양한 경험과 스토리 이제 시작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이원재]

 
 경기도는 연천군 청산면 실거주 주민 4천여 명을 대상으로 월 15만 원의 농촌기본소득을 지급하는 5년 간의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사진은 지난 8월 18일 청산면 복지관에서 열었던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 주민설명회'.
ⓒ LAB2050
 
"나는 건강이 안 좋아서 의원에 가야 해. 그런데 읍내 병원에 갔더니 이 기본소득을 안 받아준다는 거야. 지역화폐라 그렇다는데 이건 좀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

바로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였다. 한눈에도 다리가 불편해 보이던 할머니는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손을 들고 일어서서 발언을 시작하셨다. 지난 8월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면사무소와 복지관에서 연달아 열었던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 주민설명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경기도는 청산면 실거주 주민 4천여 명 개인들을 대상으로 지난 5월부터 월 15만 원의 농촌기본소득을 지급하는 5년간의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역화폐로 지급되어 원칙적으로 청산면 내에 있는 연 매출 10억 원 이하 사업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병·의원, 약국, 교육 관련 업종은 인근 전곡읍을 포함한 연천군 전역에까지 넓혀 사용할 수 있다.

대화는 이어졌다.

"할머니, 그게 지역화폐라서 그래요. 청산면 동네 식당이랑 가게도 살리자는 뜻에서 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병·의원이면 읍내에서도 사용 가능한데요?"

실제로 지역 상권은 술렁이고 있었다. 농촌기본소득 지급 전이던 지난 2월에 개점휴업 상태였던 청산복지관 앞 식당은 간판을 새로 걸고 숯불구이 장사를 한창 벌이고 있었다. 곳곳에 새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내가 가는 병원에서는 안 받던데?"
"아, 큰 병원 가시나 보다. 매출 10억 원 이상이면 안 되니까요."

"어쨌든 아파서 쓰는 돈이 많은데, 다 풀어줘야지."
"같이 고민해봐야겠네요."

"그리고 고맙긴 한데, 이게 돈만 준다고 되는 게 아냐. 버스 타고 읍내 병원 가려면 1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동네에 의사 간호사가 없는 것도 문제네요."

"동네에 없으면 교통이라도 잘 해줘야지!"

다른 분들도 연달아 손을 들었다.

"월 15만 원 줘서 뭐 하냐고요. 우리 동네도 규제를 풀어서 높은 건물이 올라갈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근처 읍내에는 고층빌딩이 막 올라간다고. 청산에도 건물이 올라가야 일자리도 생기고 활력이 생기지."
 "연천이 여러 규제가 많은 건 사실이죠. 군부대 관련 규제, 접경지역 규제, 수도권 규제가 모두 겹쳐서요… 기본소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네요."

화난 분들도 있었다. 대화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기도 한다.

"농사 지어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기본소득 준다고 좋아했더니 농기구는 전혀 사지 못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아, 농협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걸 말씀하시는군요. 매출 10억 이상은 막아두다 보니…"

"그래도 동네에서만 쓰게 해둬서 지역 식당들은 좀 숨통이 트였어요."
"제 경우 동네에서 물건 살 만한 곳이라고는 편의점밖에 없어요. 그런데 살 만한 게 별로 없어요."

"근처 편의점에는 자꾸 이야기했더니 쌀을 갖다 두었더라고요. 쌀은 늘 사게 되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추상적인 논쟁을 넘어
 
 한 지역 주민 모두에게 조건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우리나라에서는 연천군에서 실시 중인 농촌기본소득이 유일하다. 그러나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완화한 기본소득은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다.
ⓒ 셔터스톡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파격적 제도다.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핵심 원리로 삼는다.

기본소득은 우리나라에서 알파고를 업고 명성을 얻었다. 모든 인간이 이세돌 기사처럼 인공지능에 패배하고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공포 속에 소득 대안으로 화두가 됐다.

코로나19 초기에 보편적이며 조건없이 지급되었던 1차 전국민재난지원금은 모두에게 기본소득 체험을 시켜주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며 전국적 관심을 끌었고, 대선후보까지 되어 전국민에게 이 제도를 알렸다.

그렇게 높아가던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올해 20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기본소득은 포퓰리즘'이라며 비난하던 윤석열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기본소득제는 이렇게 사라지는 유행인 것일까? 청산면 현장의 주민들은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경험과 스토리는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까지 청산면 주민들에게 기본소득은 먼 이야기였을 것이다. 인공지능도 대선도 농촌 주민 개인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사실 지금까지 기본소득 논쟁은 추상적이었다. 자동화니 인플레이션이니, 푼돈인지 목돈인지, 재정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등 현란하고 중요해 보이지만 실은 체감되지 못할 논쟁 안에 너무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실험이 시작되자 스토리는 달라졌다. 당장 내게 농촌기본소득이라며 쥐어진 지역화폐 카드는 내 삶이다. 기본소득은 쌀이고 의사이고 약이며, 농기계이며, 소고기인 것이다.

현장에서 정책 시사점도 나온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청산면의 기본소득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 몇 가지가 드러난다. 음식 같은 생필품 조달에서는 기본소득의 역할이 확실하다. 상당 부분 바우처나 현물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료와 관련해서는 문제의 절반만 해결해 준다. 의료서비스 접근성이 그 나머지 절반이다. 교통약자의 이동과 관련해서는 기본소득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국가가 깔아야 하는 인프라의 역할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 현금 대신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지역 소상공인에게는 좋지만 소비자 개인들은 불편을 느낀다. 풀어야 할 갈등이다. 모두 전문가들이 끝없이 갑론을박하던 문제들이다.

다양한 형태로 전국에서 실험중
   
 선관위가 주최한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토론회(정치분야)가 25일 오후 서울 상암동 SBS에서 열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가 인사하고 있다. 2022.2.25
ⓒ 국회사진취재단
 
한 지역 주민 모두에게 조건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연천군에서 실시 중인 농촌기본소득이 유일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현장은 연천에만 있는 게 아니다.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완화한 기본소득은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다.

전남 해남군에서 시작했던 농민수당(또는 농민기본소득)이 경북 등 9개 광역 및 특별자치도에서 시행 중이다. '농민'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어 참여소득에 가깝다. 또 경기도는 문화예술인 기본소득을 도입하겠다고 천명했다. 역시 '문화예술인'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게 되니 참여소득에 가깝다. 중앙정부는 0세와 1세 부모를 대상으로 부모급여를 도입한다고 했다. 육아 참여 조건부 급여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시 참여소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형태도 있다. 서울시에서는 안심소득 시범사업을 실시 중이다. 소득이 작을수록 급여가 많아지는 음의 소득세 형태의 급여이다. 기존의 생계급여를 확대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완화한 기본소득 실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현장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이 나올 것이다. 이들을 잘 연구하고 평가하면서, 이전보다 더 나은 기본소득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국민 공론화는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아예 없애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코로나19로 집안에 갇혀 있는 일이 이제 끝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본소득 공약을 내건 대선후보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서 고령화가 가장 심한 사회를 살고 있고, 수많은 지역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지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으며, 시장 소득 및 자산불평등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수많은 문제에 대해 기본소득이 답이 될 수 있을지 또는 어떤 기본소득이 답이 될 수 있을지는 수많은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에서 나온 스토리들로부터 출발해 치열하게 토론하며 함께 결론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소득은 늘 필요할 것이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한 전환적 정책은 모두가 합의하며 도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 도그마를 벗어나 더 다양한 실험과 공론화가 필요할 때다.

마지막으로 한 주민이 손을 번쩍 드셨다.

"5년 동안 시범사업이라는데, 그 뒤에는 정말 끝나버리는 겁니까?"
"저희도 모릅니다. 주민 여러분을 포함해 우리 사회가 그때까지 어떻게 토론해 무슨 결론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이원재 / LAB2050 대표
ⓒ 이원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원재는 민간 정책싱크탱크 LAB2050을 운영하는 경제평론가이다. 삼성경제연구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희망제작소, 여시재 등 다양한 민간싱크탱크를 거쳤다. 연구, 칼럼, 방송, 강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설파하고 있다.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경기도 기본소득위원회 등에 위원으로 참여하며 정책자문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소득의 미래>, <안녕하세요, 기본소득입니다>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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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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