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그래프] (33) 고려대 이두원 "나한테 필요한 건 더 깨지고 배우는 것. 그게 얼리를 택한 이유"

조형호 2022. 9. 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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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고 뽑아 주세요" 2022 KBL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의 농구 인생을 조명해본다.
[점프볼=조형호 인터넷기자] 서른세 번째 미생은 고려대 이두원(C, 204cm)이다. 팀에서 가장 든든한 선수로 성장하고 싶은 이두원의 농구 인생을 알아보자.

#활동적인 게 싫었던 소년, 인생을 바꿔준 ‘농구공’
2022 신인 드래프트 강력한 1순위 후보 이두원은 어린 시절 운동과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활동적인 것을 싫어했고, 집을 좋아하는 ‘집돌이’였다. 평범한 초등 시절을 보내던 와중 초등학교 체육 선생님이 신체조건이 좋은 이두원을 전주남중 코치에 추천했고, 이두원은 중학교 입학 후 정식 러브콜을 받게 된다.

“그 당시에는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농구를 하겠다고 했어요(웃음). 축구는 가끔 했지만 농구는 아예 몰랐고 공을 잡아본 적도 없었죠. 부모님과 코치님께서 대화를 나누신 끝에 시작했던 기억이 나요.”

이두원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한 탓에 유급을 감행했다. 공부가 하기 싫어 엘리트 농구의 길을 택했지만 처음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직속 선배인 전주고의 경기를 보고 점차 농구공을 만지는 빈도가 늘어가면서 농구에 대한 애정을 키운 이두원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관중이 많고 화려한 경기를 보면서 의욕이 들끓기 시작했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가릴 것 없이 훈련에 열중했고, 실력이 느니까 더욱 재밌어졌죠. 2학년 때 유급해서 친구들은 3학년 올라가고 전 2학년을 한 번 더 했잖아요. 다른 친구들이 수업받을 때 전 훈련에 매진했던 기억이 나요.”

 

#두 번의 어깨 부상, 이두원은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이두원은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갔고, 팀 내 주전 센터로 자리 잡았다. 시즌 초반 우승후보로 평가받던 전주남중은 광주에서의 첫 우승 이후 4관왕을 달성했다. 시즌 초 기대와는 달리 호계중에 매번 덜미를 잡히며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던 전주남중이지만 이두원의 합류 후 승승장구했다.

“2학년 때의 기억은 좋았죠. 하지만 3학년이 졸업하고 제가 맏형이 되자마자 전주고랑 연습경기하면서 어깨를 다쳤어요. 병원 신세를 지면서 운동을 거의 못했죠. 복귀 이후에 컨디션을 쉽게 회복하긴 어려웠고, 선배들의 공백을 실감했던 것 같아요. 팀 성적도 아쉬웠어요”

중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휴가를 보내고 있던 이두원은 급하게 짐을 싸고 군산으로 합류했다. U17 국가대표에 승선했기 때문. 비교적 경력이 짧았던 이두원은 스페인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이두원은 국가대표에서 복귀한 후 전주고로 입학했다. 그러나 어깨가 다시 한번 말썽을 피웠다. 우석대와의 연습경기 도중 리바운드 경합 상황에서 어깨 탈구 부상을 당한 것. 이두원은 다시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반년 가량을 쉬고 나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당시 삼일상고 소속이었던 하윤기(현 KT)를 만나 연달아 쓴맛을 보며 발전과 성장의 열망을 더욱 키워나갔다.

“웨이트를 해야 안 아프고 건강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서울에서 재활이나 트레이닝 등 체계적인 시스템을 접하고 싶었죠. 부모님께서는 처음에 어린 아들 타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셨지만 저의 간절함을 보시고 허락하셨고, 저와 색깔이 잘 맞을 것 같은 휘문고로 전학을 선택했어요. 지금까지도 서울로 전학 간 것에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웃음).”

#100% 만족했던 서울 생활, 괴물 센터로의 성장을 알리다
휘문고로 전학 간 이후 이두원은 농구공을 만지는 시간보다 식사량과 웨이트 트레이닝에 초점을 맞췄다. 2학년 여름 징계가 풀리고 친정팀 전주고와 만나 패배하기도 했지만 그는 조급함을 가지지 않았다. 부상 재발 방지를 위해 컨디션을 유지하고 벌크업하는 데 신경을 쏟았다.

“학교에서도 조급함을 가지지 않게 많은 지지를 해줬고, 김승관 감독님께서도 항상 저의 발전을 위해 힘써주셨어요.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감독님의 진심 어린 쓴소리나 애정이 느껴져서 전혀 상처가 되지 않았고, 혼나는 것마저도 행복했죠(웃음). 1년 반이라는 시간에 100% 만족하면서 고3 시즌을 맞이했던 것 같아요.”

이두원은 3학년이 되고 본인의 몸 상태를 유지하며 팀 성적 또한 끌어올렸다. 개인 스탯에서도 20-20(득점과 리바운드)을 밥 먹듯이 하며 가치를 증명했다. 대회에서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전국에서 주목받는 센터로 성장했다.

꾸준히 본인의 주가를 끌어올린 이두원은 고려대로 진학을 택했다. 어린 시절 우연히 고려대 경기를 보고 고려대 유니폼을 입은 본인의 모습을 꿈꾼 바 있는 이두원은 가치를 인정받고 당당히 대학에 합격했다.

큰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곧바로 코로나19가 터졌다. 기대했던 대학 생활은 없었고, 대회나 공식경기 자체가 사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깨 부상이 재발했다. 반복적인 부상에 긴 재활 기간을 쏟았고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야 복귀를 알릴 수 있었다.

“적응도 못하고 자신감도 많이 잃었죠. 스스로 경쟁자들에게 따라잡혔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남들이 발전할 때 전 도태됐다고 인정하기 싫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까진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는데 고민이 점점 많아졌죠.”

#강력한 1순위 후보 ‘괴물 센터’, 항상 발전하고 성장하는 선수를 꿈꾸다
이두원의 부진은 올 시즌 초반까지 이어졌다. 경기에 나서는 시간 자체가 적었고, 코트 위에서의 임팩트도 ‘괴물 센터’라는 명성에 걸맞지 못했다. 자연스레 자신감 하락은 계속됐지만 이두원은 이번 MBC배를 통해 완벽 부활에 성공했다.

“MBC배 매 경기가 기억에 남을 정도로 저한텐 소중했고, 자신감 회복에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어요. 사실 올해 동계훈련 때 코칭스태프와 상담을 했는데 얼리 엔트리를 권유하시더라고요. 전 어깨 때문에 군대도 안 가도 되고, 더 성장해야 해서 무조건 졸업하고 싶었는데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얼리를 권유받으니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괜찮은 척했지만 생각이 많아졌고 슬럼프가 찾아왔던 것 같아요.”

MBC배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한 이두원이지만 가슴 한 켠의 공허함을 지울 순 없었다. 본인이 이 팀에서 꼭 필요한 존재인지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예전의 기량을 되찾으니 더 발전하고 싶은 열망이 선명해졌다.

“저한테 필요한 건 더 많이 져보고 깨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졸업도 정말 하고 싶었지만 농구 인생을 봤을 때 남은 대학 1년보다 프로에서의 1년이 얻을 게 더 많을 거라고 판단했죠. 동기나 후배들과 더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은 감정을 포기하긴 힘들었지만 이성적으로 프로에서의 배움을 무시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얼리를 선택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완벽한 모습을 보이긴 힘들잖아요. 하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성장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농구를 하면서 응원도 많이 받고 힘도 받았는데 이번 MBC배 때 특히나 많은 응원을 받았거든요. 응원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지인들에게 보답하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힘든 순간이 오면 대학교 때를 생각하면서 이겨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겁니다.”

이두원은 코칭스태프와 농구부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한다. 비교적 늦게 시작한 농구 인생에서 세 번의 큰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그가 ‘괴물 센터’로 프로 무대를 휘저을 수 있을지 주목해보자.

# 사진_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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