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음식 '저장'이 관건.. 땅속묻기→김칫독 →김치냉장고 발전

기자 2022. 9. 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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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냉장고가 발명돼 상용화되기 시작한 초기의 대우전자 광고. 김치냉장고는 이후 김치 자체에 관한 연구와 김치를 적절하게 보관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어진 30~40년의 시간이 흐른 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모습으로 정착됐다.
한일스텐레스사에서 스테인리스강을 이용해 만든 김치독 광고.

■ 지식카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17) 김치 보관법

낮지만 얼지 않는 일정한 온도 유지 중요

뒷마당 그늘진 곳에 묻고 조금씩 꺼내 먹으며 겨울나기

1970~1980년대 아파트로 주거 형태 바뀌며

보관 방법 고민 깊어져… 40년 연구 끝 김치 냉장고 탄생

발효(醱酵)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식재료의 맛이 향상되고 보존력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는 오랫동안 발효를 이용한 음식을 즐겨왔다. 치즈나 요거트 같은 발효 유제품과 맥주나 와인 등 각종 주류(酒類)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에서도 전통 발효 방법으로 만든 여러 음식을 오래전부터 즐겨 먹었다. 간장이나 된장 같은 장류부터 홍어를 ‘삭혀’ 먹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발효는 한반도 주민에게 식재료를 다루는 익숙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래도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발효 식품으로 김치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배추 또는 여러 채소를 소금에 절여 양념한 후 발효시켜 맛과 보존성을 높인 음식이다. 채소를 소금이나 식초 등 조미료에 절여 보존성을 높이는 식습관은 당연히 한국에서 독특하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가깝게는 일본에 각종 채소와 과일, 육류를 다양한 조미료에 절여 먹는 ‘쓰케모노(漬物)’가 있고, 멀게는 독일에 양배추를 절여 발효시킨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가 있다. 한국의 김치는 조선 중기 이후 고추가 보급되면서 현재의 모습에 가깝게 변화해 다른 지역의 염장 채소류와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 김치 문화의 특징은 김치 자체보다는 김치를 만드는 사회적 양식, 즉 ‘김장 문화’에서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김장은 보통 늦가을인 11월 중순 무렵, 배추를 비롯한 농작물의 수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후 담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족이나 마을 단위로 상당한 양의 김치를 만들어 저장해 두고 조금씩 꺼내 먹으며 겨울을 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김장은 온 가족을 동원해 치러야 하는 ‘월동 준비’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치는 김장독에 넣어 뒷마당 그늘진 곳을 골라 땅에 묻어 보관했다. 발효 속도를 늦추고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낮지만 얼지 않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2013년 유네스코는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를 세계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김장이라는 공동 작업을 통해 전통 식생활을 전승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치가 “한국인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현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1960년대 이후에도 김장은 국가적인 행사였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비슷한 시기에 김장을 담갔으니 필연적으로 물류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1961년 가을 김장철을 맞아 교통부는 철도청의 협조를 받아 하루 한 차례씩 ‘김장열차’를 특별 편성하기 시작했다. 매일 목포, 이리, 송정리 등 호남 지방에서 출발한 김장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면 서울역 광장에 무와 배추가 산더미를 이뤘다. 김장감은 중앙도매시장으로 보내져 서울 시민의 겨울나기를 도왔다. 이렇듯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1960년대에 도시 거주민들에게 김장감을 제때 공급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과제였다. 철도청의 김장열차 특별 편성은 197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동안 계속되다가 사라졌다.

한국인의 오랜 습속으로 자리 잡은 김장 문화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도시민의 주거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됐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중산층의 표준적인 주거 양식으로 떠올랐다. 농촌 지역에서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절의 문화인 김장이 도시 아파트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 마당에 온 가족이 모여 수백 포기의 배추를 절이던 김장을 핵가족 생활에 맞춘 20~30평대 아파트에서 어떻게 담근다는 말인가? 김장 규모를 줄인다고 해도 만들어진 김치를 겨우내 쉬지 않게 어떻게 보관할 수 있을까? 새로운 주거 환경과 오랜 생활 양식 사이에 발생한 균열을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할 필요가 있었다. 김치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를 결코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책은 개별 가정에서 김장을 담그는 것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만든 김치를 먹는 것이다. 김치의 경우는 아니지만 이와 같은 해결책이 1960년대 후반에 실제로 제시되기도 했다. 김현옥(金玄玉)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1969년에 아파트 주민에게 된장과 간장을 공급할 수 있는 ‘장유(醬油)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서울시의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선 1만 명분의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그 규모를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중요한 목적은 서울 아파트에서 장독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농촌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물론, 서울에 살고 있었더라도 아파트에 처음 살게 된 사람들은 뒷마당에 줄지어 있던 장독대를 그대로 아파트 베란다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 시장은 ‘장독대 없애기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장독대를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인습(因襲)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주부의 노동력이 많이 들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한 발효 식품 보관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주거 환경에 맞는 생활 습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독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문제는 김치를 장기간 보관할 방법이 여전히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중산층 가정에 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김치를 보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치를 겨우내 보관하기 위해서는 저온으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냉장고는 저온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매일 수십 차례 문을 여닫는 과정에서 상당한 온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김치가 빨리 쉬어 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김치의 특성상 냉장고에 보관하는 다른 식재료에 냄새가 배기도 했다. 이렇듯 뒷마당에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는 것만큼 효과적인 기술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안됐다. 합성수지인 스티로폼을 이용해 김치가 “얼지 않고 쉬지 않는” 용기가 1970년 ‘아폴로 김치독’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기성 김치독에 스티로폼 덮개를 씌워 온도 변화를 줄여주는 ‘김치독 싸개’라는 제품도 나왔다. 급기야 1980년대 초에는 한일스텐레스사에서 스테인리스강을 이용한 김칫독을 판매하기 시작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회사는 “땅속에 묻을 필요가 없어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에게 권할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결국 이 문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치 전용 냉장고가 등장하면서 일부 해소됐다. 김치냉장고의 등장과 함께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김장독의 온도 유지를 위해 제안된 여러 보조적 테크놀로지가 사라졌다. 물론 김치냉장고 역시 김치의 장기간 보관이라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피드백 제어나 퍼지 로직과 같은 최첨단 전자공학 기법을 응용한다고 해도 아파트라는 극도로 인공적인 공간에서 전통적인 김치 보관법에 비견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위해 김치의 발효 과정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먼저 이뤄져야 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냉장고 내부의 이상적인 온도 프로필과 김치의 숙성 과정에 따라 어떻게 온도를 미세하게 조정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즉, 김치를 적절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김치 자체에 대한 지식이 만들어졌고, 그 지식은 다시 차세대 김치냉장고에 적용되는 과정이 지난 30~40년 동안 반복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김치냉장고는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서서히 만들어졌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오늘날, 예전과 같이 늦가을에 대규모 김장을 담그는 집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제 전국 각지의 마트에서 꽤 먹을 만한 김치를 구매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2011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73.8%의 한국인이 정기적으로 김장을 담근다고 답했다. 이 통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김치는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하나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연결망이 반드시 필요했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용어설명 -피드백 제어(feedback control)

사이버네틱스의 등장으로 정식화된 시스템 자동 제어 기법의 하나다. 시스템의 출력값을 다시 입력값으로 되먹여(feedback) 원하는 동적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동물과 식물의 경우 생존을 위해 대개 피드백 제어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하지만 기계 또는 전자 시스템에서 그 논리를 정식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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