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들 "전세금 낮춰야 재계약".. 커지는 역전세난

정순구 기자 2022. 9.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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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시장 침체-월세 확산 여파
서울 전셋값 올들어 하락세 지속
올해 1월 이후 전셋값 하락세가 계속되면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산 ‘갭 투자자’를 중심으로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대출 부담이 늘며 전세 수요가 감소한 탓에 전세 매물도 1년 전보다 50% 이상 증가한 상태다. 동아일보 DB
위례신도시 A아파트 전용면적 51m²에 전세로 거주 중인 김모 씨(38)는 올해 12월 재계약을 앞두고 계약갱신요구권 사용 여부를 묻는 집주인에게 ‘공증’을 요구했다. 2년 전보다 주변 단지 전세 시세가 5000만 원 정도 하락했으니 재계약할 때 이를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라는 요구다. 김 씨는 “2년 전에는 매물도 거의 없어서 비싼 값에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주변에 전세가 꽤 많다”며 “집주인이 응하지 않으면 저렴한 전셋집으로 이사 가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전세 수요가 줄어들고 전셋값 하락이 계속되면서 집주인이 전세 기간이 끝나도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逆)전세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고액 전세를 중심으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재계약 때 하락한 만큼 보증금을 일부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시장에 이전보다 저렴한 전세 매물이 남아돌고,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워지며 나타난 현상이다.

4일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아파트실거래가)에 따르면 이날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3만5881건으로 한 달 전(3만1781건) 대비 12.9% 증가했다. 1년 전(2만2734건)과 비교하면 57.8% 증가했다. 이처럼 전세 매물이 쌓이면서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 역시 1월 셋째 주(17일 기준) 0.01% 상승을 끝으로 8월 넷째 주(29일 기준)까지 32주 연속 상승하지 못했다.

안성용 한국투자증권 부동산팀장은 “지금의 전세 시장은 1∼2년 전과 180도 다른 분위기”라며 “기준금리가 계속 오를 가능성이 큰 만큼 전세 가격 하락세는 최소 내년 상반기(1∼6월)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세 시세 1억 내린 만큼 이자 매달 달라”… 세입자 목소리 커진다


커지는 역전세난

월세 전환 늘고 전셋값 떨어져 갭투자로 자금난 몰린 집주인들
세입자 구하기 어려워져 궁지… 전세기간 아예 8년 계약하기도
못돌려준 보증금 7월 872억 최다


서울 성동구 B 아파트 전용 84m²를 보유한 40대 박모 씨는 이 집에 보증금 10억 원을 내고 살던 세입자에게 이달 초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세입자는 인근 시세가 자신이 낸 전세 보증금보다 1억 원가량 낮아졌으니 재계약 때 1억 원을 돌려주거나 이에 해당하는 전세 대출 이자를 매달 입금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로 집을 산 터라 여유자금이 없는 박 씨는 매달 이자를 내주는 방식으로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다. 박 씨는 “요즘 전세 세입자를 새로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기존 세입자가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돌려줄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입자가 오히려 ‘귀한 몸’이 되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읍소해야 하는 ‘역전세난’ 상황은 주로 여유자금이 없는 ‘갭투자자’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갭투자로 주택을 매입한 집주인이 기존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새 세입자와 전세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전세 매물이 남아돌고 가격이 하락하면서 기존 가격에 새 세입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전세로 거주할 세입자를 찾는 게 쉽지 않아지면서 집주인이 계약 기간을 2년보다 길게 설정하자고 매달리는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서울 강동구에 거주하는 회사원 서모 씨(48)는 최근 전세 계약을 맺으며 기간을 8년으로 정했다. 서 씨는 “현재의 전셋값이 고점이고 앞으로 계속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며 “갭투자로 집을 매입한 탓에 여유자금이 거의 없어서 전세 세입자가 오래 거주할수록 나에게 좋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세 매물이 남아도는 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전세대출 이자가 급등하면서 ‘전세의 월세화’가 빠른 속도로 이뤄진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집계에 따르면 7월 전·월세 거래 중 월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50.3%로 조사됐다. 월세 비중이 늘어난 만큼 전세 수요는 줄어든 셈이다. 전세가 워낙 비싸지면서 짧은 기간 급등한 전세 보증금을 시장 수요자들이 부담하기가 버거워진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전세가격 하락세가 계속되면서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고도 늘어나는 추세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전세 계약이 만료된 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사고 액수는 올해 7월 872억 원(421건)으로 집계됐다. 금액과 건수 모두 월간 기준으로 역대 최대·최다치다. 올해 상반기(1∼6월) 사고액 역시 3407억 원을 기록해 반기 기준으로 역대 가장 컸다.

전문가들은 하반기(7∼12월) 기준금리 추가 인상이 예상되는 만큼 전셋값 하락과 전세의 월세화가 더 지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결국 기준금리 상승세가 어느 선에서 멈출 것인지가 전세시장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역전세난’ 현상이 매매시장 침체를 강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우병탁 신한은행 WM컨설팅센터 부동산팀장은 “한국 부동산 시장은 전셋값이 매매가격을 어느 정도 지탱해주는 면이 있다”며 “전셋값 하락세가 이어진다면 한동안 매매가격의 하방 압력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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