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日민예관서 조선 예술품 전시회
"상대에 대한 공경심, 평화의 요체"
韓·日 관계서도 절대 잊으면 안돼
일본 도쿄 메구로(目黑)구의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은 근사한 외관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수더분하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건물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되었으나 잘 관리된 건물이 가진 품격이 물씬하다. 나무로 된 전시실 바닥은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낡음의 표시라기보다는 이곳에 깃든 시간의 징표처럼 느껴진다.
야나기와 조선의 인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사카와(淺川) 노리타카(伯敎·1884∼1964)·다쿠미(巧·1891∼1931) 형제다. 야나기는 아사카와 형제가 선물한 백자를 본 뒤 조선예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에는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이 있다. 1910년대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문화, 도자기, 민예 연구에 주력했던 그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의기투합한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는 1924년 경성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조선예술에 대한 애정은 식민지 조선의 처참한 현실과 조선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졌고, 때로는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분노로 표현됐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야나기는 자신의 조국을 향해 “반항하는 그들보다 압박하는 우리들이 더 어리석다”고 일갈했다. 경성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노리타카는 무자비한 진압을 목격한 뒤 괴로워하다 사표를 냈다.
지난 6월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답사에 동행취재를 갔을 때 만난 한 일본인 여성 참가자는 “그 시절(일제강점기) 한국을 사랑하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혹독했던 그 시절, 일제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한 후진성의 증표로 해석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복궁과 같은 수많은 사적들을 파괴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고분을 고적 조사라는 미명 아래 파헤치는 등의 만행이 이어졌다. 야나기나 아사카와 형제의 존재가 더욱 특별한 것은 그래서다.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가치를 발견해 널리 알렸고, 이런 성과는 지금도 한국 전통예술을 풍부하게 하는 토대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일본민예관이나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은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에도 꽤 알려져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만들어진 아름다운 인연을 기억하는 것은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일본민예관 상무는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에서 야나기의 조선예술에 대한 애정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미(美)에 대한 경의로 맺어진 타자에 대한 공경심이야말로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양국 관계를 재정립하고, 건강한 미래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가 한창인 요즘인지라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강구열 도쿄특파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몸에 걸친 것만 1000만원…‘흑백요리사’ 안유성, 명품 입는 이유
- “임신했는데 맞았다 하면 돼” 아내 목소리 반전… 전직 보디빌더의 최후 [사건수첩]
- “저 여자 내 아내 같아”…음란물 보다가 영상분석가 찾아온 남성들
- “오늘 점심도 부대찌개 먹었는데…” 깜짝 놀랄 연구 결과 나왔다
- “보면 몰라? 등 밀어주잖아” 사촌누나와 목욕하던 남편…알고보니
- ‘살해범 특징 목 문신?’…폭력적이고 공포 유발하려는 의도
- “정관수술 했는데 콘돔 갖고 다닌 아내”…아파트·양육권 줘야 할까?
- 퇴사했던 ‘천재 직원’ 데려오려고 3조6000억원 쓴 회사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