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강구열 2022. 9. 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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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예품 매료된 야나기 설립
日민예관서 조선 예술품 전시회
"상대에 대한 공경심, 평화의 요체"
韓·日 관계서도 절대 잊으면 안돼

일본 도쿄 메구로(目黑)구의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은 근사한 외관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수더분하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건물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되었으나 잘 관리된 건물이 가진 품격이 물씬하다. 나무로 된 전시실 바닥은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낡음의 표시라기보다는 이곳에 깃든 시간의 징표처럼 느껴진다.

처음 보았지만 금세 빠져든 건 일본민예관이 가진 우리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설립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일본 문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종교철학자, 미술평론가다. 그리고 조선의 예술을 깊이 사랑했다. 일본민예관은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야나기는 조선인들에게 경애의 마음을 보내는 한편 무명의 장인들이 만든 일상품의 미(美)에 눈을 떴다”고 소개하고 있다.
강구열 도쿄특파원
지난 1일 일본민예관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의 공예’ 전시회가 시작됐다. 주일한국문화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후원하는 전시회에는 도자기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공예품 300여점이 출품됐다. 당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졌던 야나기가 수집한 전시품들은 하나하나가 빼어나다. 닭이나 개구리 등 동물 모양을 한 연적이나 문을 고정하는 데 썼던 경첩 같은 전시품에 눈길이 닿으면 그가 일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는 일본민예관의 설명이 어떤 의미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야나기와 조선의 인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사카와(淺川) 노리타카(伯敎·1884∼1964)·다쿠미(巧·1891∼1931) 형제다. 야나기는 아사카와 형제가 선물한 백자를 본 뒤 조선예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에는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이 있다. 1910년대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문화, 도자기, 민예 연구에 주력했던 그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의기투합한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는 1924년 경성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조선예술에 대한 애정은 식민지 조선의 처참한 현실과 조선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졌고, 때로는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분노로 표현됐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야나기는 자신의 조국을 향해 “반항하는 그들보다 압박하는 우리들이 더 어리석다”고 일갈했다. 경성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노리타카는 무자비한 진압을 목격한 뒤 괴로워하다 사표를 냈다.

지난 6월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답사에 동행취재를 갔을 때 만난 한 일본인 여성 참가자는 “그 시절(일제강점기) 한국을 사랑하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혹독했던 그 시절, 일제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한 후진성의 증표로 해석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복궁과 같은 수많은 사적들을 파괴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고분을 고적 조사라는 미명 아래 파헤치는 등의 만행이 이어졌다. 야나기나 아사카와 형제의 존재가 더욱 특별한 것은 그래서다.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가치를 발견해 널리 알렸고, 이런 성과는 지금도 한국 전통예술을 풍부하게 하는 토대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일본민예관이나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은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에도 꽤 알려져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만들어진 아름다운 인연을 기억하는 것은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일본민예관 상무는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에서 야나기의 조선예술에 대한 애정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미(美)에 대한 경의로 맺어진 타자에 대한 공경심이야말로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양국 관계를 재정립하고, 건강한 미래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가 한창인 요즘인지라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강구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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