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차없는 거리' 폐지 멀어지나.."상권 침체에 불편 가중"vs"보행자 안전 위협·신촌 정체성 잃을수도" 갈등
최근 서울 서대문구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찾은 오 모씨는 병원 초행길을 이같이 묘사했다. 신촌 지역 대형차도 두 곳을 잇는 '연세로'가 보행자 전용길이 되며 예상치 못한 고충이 생겼다는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도심인 신촌 연세로의 '차없는 거리'를 놓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이성헌 신임 서대문구청장은 "'차없는 거리'가 신촌 쇠퇴를 가속화한다"는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용해 철폐를 추진하고 있지만, 인근 대학교의 학생 대표들은 신촌의 문화적 정체성 상실과 보행자 안전에 대한 우려를 내세우며 이를 반대하고 있다.
4일 서대문구 등에 따르면, 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서강대학교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연세로 공동행동(공동행동)'은 3일 신촌역 연세로에서 '차없는 거리' 폐지에 반대하는 공식 입장표명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은 "서대문구청의 일방적인 정책 집행을 규탄한다"며 정책 추진에 반대했다.
'차없는 거리'는 연세대 정문과 신촌로터리를 잇는 약 500m 길이의 연세로에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이다. 금요일 오후 2시부터 일요일 오후 10시부터는 전 차량이 우회해야 하며, 이외 시간에도 대중교통인 버스만 통행이 가능하다.
해당 정책은 연세로의 상습 정체를 해소하고, 보행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14년부터 시행됐다. 동시에 유동인구가 증가해 쇠퇴하던 신촌 상권에 활력을 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지역 상인들 역시 이같은 효과를 기대하며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행 8년만에 지역민들의 입장은 180도 달라졌다. '차없는 거리'로 인해 지역 쇠퇴는 가속화됐고, 정책 목표 달성에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 상인들 사이에선 정책으로 인한 누적 피해로 상권이 심각하게 침체됐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신촌에서 나고 자란 박 모씨(70)는 지난달 33년간 운영했던 족발집을 폐업했다. 그는 "연세로를 중심으로 반경 300m 이내 상가들은 1층을 제외하곤 60% 넘는 곳이 텅텅 비었다"며 "'차없는 거리'로 신촌을 찾는 발길이 더욱 줄어들는 와중에 코로나19까지 겹치니 인건비 등 지출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밝혔다. 신촌에서 18년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 모씨(42)도 "2014년 정책 시행 이후 장사가 잘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관련 통계는 상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서대문구에 따르면 연세로가 있는 신촌동의 경우 최근 상업 점포의 5년 생존율이 32.3%로 서대문구 14개동 가운데 가장 낮았다. 또 지난해 기준 서울시와 서대문구 공히 개업 점포수가 폐업 점포수를 웃돌았지만, 신촌동은 점포 91곳이 순감하며 서대문구내 최대치를 기록했다.
신촌지역 상인들과 지역민들은 2018~2019년부터 이같은 근거를 기반으로 '차 없는 거리' 철폐를 주장해왔다. 최근엔 '차없는 거리' 철폐에 찬성하는 연명부에 2000명이 넘는 지역민들의 서명을 받아 서대문구청에 제출했다.
이 문제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당시 출마했던 여야후보 역시 모두 철폐를 약속했다. 이성헌 신임 구청장이 취임 직후 '차없는 거리' 철폐를 추진한 것도 이같은 지역민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조처였다.
'공동행동'의 반대 논거는 △보행자 안전 위협 △신촌 지역 교통체증 심화 △문화중심지로서 정체성 상실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차없는 거리가 보행자 안전을 지키고 교통체증을 완화시키는 등 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우선 신촌을 경유하는 차량들이 유의미하게 줄어들지 않은 이상 연세로를 거쳤던 차량이 주변 골목길의 이면도로를 이용하면서 오히려 보행자들에게 위협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한 지역민은 "멀쩡한 차도를 인도로 만들어버리니까 오히려 인도(골목길)는 차도가 됐다"고 했다. 실제 최근 찾은 연세로 주변 골목길 곳곳에서는 주류를 가득 실은 업무용 트럭이나 택시들이 좁은 골목길을 오가며 보행자들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연세로의 주변도로들이 정체가 심해지는 '풍선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신촌기차역 굴다리는 '차없는 거리' 시행 후 대표적인 우회도로로 이용됐다. 이에 서울시는 연세대 방향으로 좌회전 차로를 추가 신설해 정체를 해소하려고도 했다. 추가 차로는 일정부분 효과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지역을 통과하는 차량의 평균 속도는 지난해 기준 시속 7.7km에 불과하다. 서울시 전체 도로의 평균 속도가 시속 23km인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거북이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근 이정표를 찾는 이들도 불편함이 적지 않다. 전국 5대 종합병원중 하나인 연세 세브란스병원은 전국에서 오는 환자들을 맞이하는데, 이들은 초행길에 차량 통행이 금지된 연세로를 크게 우회하거나 길을 헤메는 경우도 있다.
'문화정체성 상실'이란 주장에 인근 상인들은 학생들이 신촌을 문화공간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신촌 발전위원회 관계자는 "신임 구청장 취임 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간담회에서 주말동안에는 버스킹 공간과 무대 등이 사라지지 않도록 협조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상권이 침체되는 것이 '차없는 거리'와 관계가 없다고도 한다. 공동행동 측 관계자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데이터를 보면 '차없는 거리' 시행 후 매출이 늘었다는 데이터도 있다"며 "신촌 상권의 경쟁력이 떨어져 홍대나 연남동 등 주변상권으로 유출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촌 주민자치회 측 관계자는 "해당 자료는 신용카드 결제를 기반으로 만든 자료"라며 "차없는 거리 시행 전후 신용카드 사용률과 물가 상승을 고려하지 않은채 단순히 매출이 일부 올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탁상공론"이라며 주장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신용카드 이용실적은 2014년 대비 약 49% 상승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신용카드 매출은 증가할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이다.
서대문구 관계자에 따르면 오는 8일 구청측은 다시 한 번 대학생들과 면담을 실시할 예정이다.
[류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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