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없는 한국인 혹은 실 없는 한국인 [노원명에세이]

노원명 2022. 9. 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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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직장에나 부하 직원에게 있는 대로 성질머리를 부린 후에 금방 분이 풀려서는 “야, 내가 뒤끝은 없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상사가 있다. 아니 있었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성질을 부렸다가는 직장에서 버텨내기 어렵다. 뒤끝이 없다는 것은 맺힌 데 없이 담백한 성격을 말한다. 그런데 걸핏하면 화내고 그때마다 ‘뒤끝 없음’을 외치는 상사가 있다면 그가 없는 것은 뒤끝이 아니라 감정 조절 능력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실 없다’고도 한다.

지난 1일 동아시아연구원과 ‘겐론 NPO’가 발표한 ‘한일 국민 상호 인식조사’를 보면서 한국인은 뒤끝이 없는 것인지 그냥 실없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올해 조사에서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호감도는 두 나라 모두 30%대에 진입하며 10년 내 역대 최고치에 근접했다. 그런데 그 진폭은 양국 간에 차이가 크다.

일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4년 전 28.3%에서 2년 전엔 12.3%로 급락했다가 이번에 30.6%로 급반등했다. 반면 한국을 좋게 보는 일본인은 4년 전 22.9%, 2년 전 25.9%, 올해 30.4%로 비교적 ‘차분’한 흐름이다. 한국인이 2년간 18.35%p 뛸 때 일본은 4.5%p 오른 것으로 그 진폭의 차이는 4배 이상이다.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응답한 한국인 비율은 4년 전 50.6%에서 2년 전엔 무려 21%p나 높아진 71.6%로 뛰었다가 이번에는 52.8%로 다시 4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중 한국을 싫어하는 비중은 4년 전 46.3%, 2년 전에도 똑같은 46.3%, 올해는 40.3%로 낮아졌다.

이 조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본은 가만히 있는데 한국 혼자서 울다 웃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 내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0년조차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호감도는 2018년에 비해 3%p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은 15%p 급락한 것과 크게 비교된다. 한국인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데 일본인은 수온 변화가 극히 완만하다.

이런 국민성의 차이야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이다. 과거 일본은 이런 한국인의 기질을 두고 ‘냄비근성’ 또는 ‘반도 기질’이라 경멸했다. 예전에는 그 말이 무척 치욕스럽게 느껴졌겠으나 우리가 일본만큼 잘살게 된, 미구에 1인당 소득마저 역전될 것이 거의 확실해진 지금에 와선 ‘그래서 뭐?’ 하는 당당함이 한국인들에게 생겨났다. ‘나 원래 뒤끝 없는 성격이잖아. 알지?’ 하는 직장상사처럼 말이다.

거의 돌변하다시피 하는 감정의 기복은 정치 영역에서도 관찰된다. ‘정권연장만 아니라면 그게 막대기라도 찍겠어’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사람이 새 정권 출범 후 한 달여 만에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며 ‘아이고 구관이 명관이었네’ 한다. 참 뒤끝도 없다. 막대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전임 대통령이 며칠 사이 ‘명관’ 반열에 오르는 극적 반전이 한국에서는 가능하다. 가능한 게 아니라 늘 그렇다. 정권에 따라 시점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현관이 구관에 패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이런 ‘뒤끝 없는’, 혹은 ‘실 없는’ 성격의 장점은 새로 시작하는 것에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다. 어제까지야 어땠을망정 오늘 기분에 따라 움직인다. 자기가 기왕에 쏟아낸 말과 행동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어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대에게 ‘야 뭐 꽁하게 그러냐. 한잔하자’ 이런 식이다. 그게 통해서 ‘그 사람 성격 참 쿨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본인 마음이 편하다. 암에 잘 걸리지 않을 성격이다.

이런 성격의 단점이라면 늘 원점이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 맥락 없이 불끈 성질을 내면서 상대를 아연하게 만든다. 매일 성내고 매일 ‘뒤끝 없이’ 화해를 청하고...그런 관계에선 상황의 본질적인 개선은 있을 수 없다. 신뢰가 누적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일관계 얘기로 돌아가자면 ‘일본과 친해야 우리 공간이 넓어진다’고 제법 의젓한 얘기를 하다가도 무슨 기념일이 되면, 정권 지지율이 꺾어지면 ‘진심 어린 사과는?’ ‘위안부는?’ ‘징용공은?’ 하고 한발도 나가지 않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만사휴의. 먼지도 쌓이지 않는다.

한 번쯤 세계무대에서 놀아본 선수들 예컨대 영국이나 미국, 일본, 독일 같은 나라의 국민성은 성을 함부로 내지 않고 뒤끝은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다.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다들 그들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 쉽게 성내고 뒤끝 없이 행동하는 성격의 작은 단점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품위가 없고 매력도 없다는 것을 들겠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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