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몸은 브라질, 심장은 포르투갈에 묻힌 브라질 초대 황제

추왕훈 2022. 9. 3.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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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1세, 포르투갈 왕세자이면서도 브라질 독립 주도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외쳤던 강변은 민족의 성지로
"나의 피는 흑인 노예와 같은 색깔"..마지막 유언도 "노예 해방"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자였음에도 식민지 브라질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프랑스 화가 앙리 그레브동 1830년 작 [브라질 황제 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축구 황제' 펠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브라질에도 '진짜 황제'가 있었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드루 1세(1798~1834)가 처음이고 그의 아들 페드루 2세(1825~1891)가 마지막이다. 19세기 전반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같은 크리오요(신대륙에서 태어난 백인) 엘리트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 스페인 치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브라질 역사에서는 식민종주국 포르투갈의 왕족인 초대 황제가 독립의 주역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의 주앙 왕세자(나중의 주앙 6세) 겸 섭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난 페드루 1세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을 대신해 세 살 때 왕세손으로 책봉됐다. 1807년 전성기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으로 진격해 오자 어린 페드루는 부모를 포함한 왕실 구성원들과 함께 가장 크고 부유한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피란해야 했다.

페드루는 브라질에서 자라면서 볼테르, 뱅자맹 콩스탕,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계몽사상가와 입헌군주론자의 사상에 매료됐다. 청년 시절 거리에서 만난 주민들이 존경의 표시로 말 대신 몸으로 자신의 마차를 끌려고 하자 이를 말리면서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신에게나 합당한 숭배를 나에게 표하지 마시오. 내 피나 흑인 노예의 피나 같은 색깔이라오." 이런 일화를 보면 타고난 성품도 인간적이었던 듯하다. 그는 언젠가 왕이 될 신분이었지만 유럽에서 횡행하던 전제적 통치와 그 연장선에 있는 식민지배를 혐오했다.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왕세자 겸 섭정으로서 브라질을 통치하던 페드루는 1822년 9월 7일 상파울루주 이피랑가 강변에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이날은 브라질 독립기념일로 기려진다. 브라질 작가 페드루 아메리쿠 1888년 작. [이피랑가박물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포르투갈 왕가가 브라질로 옮겨와 있는 동안 마침내 나폴레옹이 패배했고 1816년 페드루의 아버지 주앙 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0년 이상 식민종주국의 지배에서 사실상 벗어나 자율과 자유 교역에 익숙해진 브라질 엘리트들로서는 과거의 억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앙 6세의 귀국 이후 브라질에 남아 섭정으로서 개인의 재산권 보호, 정부 재정 지출 및 세금의 삭감, 정치범 석방 등 개혁적 조치를 펼쳐온 페드루는 양자택일이 불가피한 상황이 오자 브라질 편에 서기로 했다.

독립의 대의를 설파하기 위해 지역 방문에 나선 페드루 왕자는 상파울루에서 당시 브라질 수도이자 거주지인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동하던 중 재상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포르투갈 정권을 장악한 코르테스(신분제 의회)가 즉각적인 그의 귀국을 요구했으며 브라질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말에 탄 채로 브라질 역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고 한다. "동지들이여, 포르투갈 코르테스가 우리를 노예로 삼고 박해하려 한다. 오늘부터 우리와 그들의 유대는 끊어졌다. 나의 피와 나의 명예, 나의 신에 맹세코 나는 브라질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다. 브라질인들이여, 오늘부터 우리의 좌우명은 이것이다.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브라질 독립 기념비 1922년 9월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맞아 상파울루 이피랑가 강변에 설치된 이 기념비는 '이피랑가의 외침' 연설을 비롯해 브라질 독립의 상징 인물과 사건, 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다. 기념비 아래에 심장을 제외한 페드루 1세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이탈리아 조각가 에토레 시메네스 작. [상파울루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페드루 왕자가 '이피랑가의 외침'이라고 불리는 이 연설을 한 상파울루의 이피랑가 강변은 브라질 독립의 성지가 됐고 그날, 1822년 9월 7일은 독립의 날로 기려지고 있다. 브라질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에 힘입어 페드루는 그해 12월 대관식과 함께 페드루 1세로 등극했으나 그의 앞에는 구체제 지지 세력의 반란, 외세와 결탁한 분리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 등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페드루 1세를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은 포르투갈 국내 정치였다. 1826년 3월 부왕 주앙 6세가 세상을 떠나고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국왕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양쪽 국민이 모두 이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곧 딸 마리아에게 양위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심이 있던 동생 미겔 왕자가 절대군주제를 추구하는 반란 세력과 합세해 왕위를 찬탈했다. 브라질에서 그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포르투갈 왕족 핏줄을 거론하는 비방이 끊이지 않았고 1831년에는 내각 교체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일어난 폭동에 황실 근위대까지 가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페드루 1세는 한밤중에 다섯 살 아들에게 양위하고 바로 그날 새벽 유럽으로 향하는 영국 군함에 몸을 실었다.

남은 과제는 딸 마리아의 빼앗긴 왕위를 되찾고 포르투갈의 입헌군주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브라간사 공작이 된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군사적, 외교적 지지를 호소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포르투갈인들과 외국인 자원병들로 겨우 군사를 모아 포르투갈 원정에 나선 페드루는 포탄이 쏟아지는 최일선에서 손수 대포를 장착하고 참호를 파고 부상자를 돌보며 악전고투했다. 드디어 딸 마리아의 왕관을 되찾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쟁 중에 얻은 폐결핵이 악화하면서 1834년 9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브라질로 귀환한 초대 황제의 심장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의 심장이 브라질로 돌아왔다. 브라질 국민들은 살아 있는 황제가 돌아온 듯 최상의 예우로 맞이했다. 그의 심장은 독립 200주년 기념일인 9월 7일까지 브라질에 머물 예정이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브라질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구술했는데 여기에 담긴 그의 마지막 소망은 노예제의 폐지였다고 한다. "노예제는 악이며 인류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노예로 붙잡힌 사람들보다는 법률로써 노예제를 허용하는 국가에 더욱 해롭습니다. 노예제는 그 나라의 도덕성을 파괴하는 암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포르투의 라파 교회에 모셔졌다. 나머지 시신은 1972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상파울루 이피링가 강변에 안치됐다.

포르투갈의 왕이 될 신분이었음에도 브라질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그의 진심을 당대의 많은 브라질인이 믿지 못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치적 신념보다는 핏줄을 따라 브라질을 다시 포르투갈에 예속시키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정으로 브라질을 사랑했던 황제를 다시 보고 사랑하게 됐다. 브라질 독립 200주년이 되는 올해 여름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쳤던 그의 심장이 브라질로 일시 귀국했다. 브라질은 살아 있는 황제를 맞듯이 예포를 터트리고 '독립의 노래'(Hino da Independencia)를 연주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페드루 1세 황제가 1822년 작곡한 노래다.

초대 황제에게 보내는 브라질의 '하트'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의 심장이 귀환한 것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공군기가 하늘에 만든 하트 모양.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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