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여성 지도자들

한겨레 2022. 8. 3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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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 줄리아 길라드의 ‘여성혐오 연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오스트레일리아 텔레비전 장면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디언 뉴스> 유튜브 갈무리

[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영화제에서 혼자 보기 아까운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강력한 여성 지도자〉(2021)가 그랬다.

영화는 2018년 <비비시>(BBC)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된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 줄리아 길라드에 대한 여성혐오를 다룬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재임했던 길라드는 젊은 여성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매체를 비롯해 사회 전반적으로 성차별적인 반응과 발언에 시달린다. 영화는 그 어떤 내레이션도 없이 기록 영상만을 사용해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길라드가 오스트레일리아의 27대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48살이었다. 독신이고 자녀가 없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없어 권위가 없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언론은 그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패션 센스가 어떤지, 어떤 머리 모양을 했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체형과 걸음걸이가 어떤지에 주목했다. 정치력과 지도력에 관해 말하기보다 외모 품평을 하고 가십거리를 만들어냈다.

그가 왜 결혼하지 않는지, 미용사 남자친구와는 어떤 관계인지, ‘남성다운 일’이 아닌 미용 일을 하는 남자친구는 게이가 아닌지 등의 소문과 험담이 쏟아졌다. 심지어 2011년에는 〈집에서 줄리아와 함께〉라는 드라마가 제작된다. 극 중에서 총리와 파트너는 관저에서 알몸으로 국기를 몸에 감고 업무상 급한 전화를 받고 있다고 거짓말하며 사랑을 나눈다. 드라마는 젊은 여성 정치인에 대한 사회적 험담이 생성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러닝타임 내내 남자들은 여성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다. 총리를 비롯한 여성 정치인들이 발언할 때마다 말을 자르고 비웃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으라며 소리친다. ‘맨스플레인’이 끝도 없이 벌어진다. 권위를 가진 국회의원과 의장도 피해갈 수 없다. 여성 의원이 끝까지 말할 테니 들으라고 하자, 남성 의원은 말을 자르다 못해 고양이 우는 소리를 하며 ‘캣콜링’을 한다. 지나가는 불특정 여성을 향해 휘파람 소리를 내거나 혹은 성희롱을 하는 행위가 의회에서 벌어진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다.

정치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길라드는 총리로서 본분을 다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총리로 평가받는 그는 국가장애보험 제도를 비롯해 탄소세 부과, 공공교육 개혁, 대체에너지 지원, 연금 개혁 등 570개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지는 건 객관적 평가가 아닌 여성혐오다. 야당 대표인 토니 애벗은 길라드를 반대하는 집회에서 “마녀를 버려라”라는 성차별적 피켓 앞에 서서 혐오에 동조한다.

2012년 10월9일, 의회에서 애벗이 총리가 성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자 길라드는 ‘여성혐오 연설’(Misogyny Speech)을 통해 이제껏 야당 대표와 야당이 해왔던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복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대중과 매체의 여성혐오를 조장해왔는지 지적한다. 당신에게는 절대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강의하지 않겠다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거울이라고 말한다. 의회 연설 영상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300만회 이상 재생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을 다루고 있지만 과거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강력한 여성 지도자의 얼굴로 이어진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 미국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 등 영화 속 이야기는 현재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기록영상으로만 구성된 이 영화는 공적인 기록으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음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을 한국의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 바꾼다고 해도 같은 주제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테다. 함께 보고 싶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여성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쏟아지는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경유해 사회의 단면을 비추는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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