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한국 체조 초유의 '반쪽 출전' 위기

권종오 기자 2022. 8. 3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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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1년 연기로 한국 체조가 사상 처음으로 '반쪽 출전'의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항저우아시안게임은 애초 오는 9월 10일 개막해 9월 25일 폐막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자국 내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연기를 요청했고 결국 대회는 1년 연기돼 2023년 9월 23일 개막하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국 체조입니다. 2023 세계기계체조선수권과 일정이 거의 겹치기 때문입니다. 2023 세계기계체조선수권은 내년 9월 30일부터 10월 8일까지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립니다. 지난 2013년 '도마의 신' 양학선이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대한체조협회와 국내 체조인들은 항저우아시안게임이 연기되기 전부터 2023년 세계선수권이 9월 말에 개막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아시안게임 연기가 결정되자 세계선수권과 일정이 겹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정확히 1년을 연기했으면 세계선수권과 일정이 중복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항저우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는 대회를 2023년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치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기계체조 세부 경기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대회 후반부에 체조가 편성되면 세계선수권 출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회가 개막하자마자 체조가 시작된다고 해도 끝나자마자 벨기에로 이동해 거의 하루의 여유도 없이 바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해야 할 상황입니다. 중국과 벨기에의 시차와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국 체조계는 2023 세계선수권 일정 변경을 내심 원하고 있지만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국제체조연맹이 아시안게임을 '로컬 대회'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한국과 손을 잡고 한 목소리로 강력히 요청하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선수층이 우리보다 풍부한 중국과 일본의 경우, 1진급 선수는 세계선수권에, 2진급 선수는 아시안게임에 내보내면 그만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시안게임 1년 연기로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상 한국밖에 없습니다. 대회 일정이 중복되기 때문에 아시안게임에 나갈 선수와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선수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2023 세계선수권이 2024년 파리올림픽 예선으로 치러진다는 점입니다. 남녀 모두 정예 멤버가 세계선수권에 총출동해도 객관적 전력을 고려하면 파리올림픽 출전 티켓을 장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대표팀 선수들이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두 대회로 나뉘어 분리 출전할 경우, 올림픽 단체전 출전은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난 21일 전남 광양에서 국내 체조대회가 폐막됐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여러 체조인들로부터 '큰일 났다'는 걱정의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스포츠에서는 최고 무대가 올림픽이니만큼 파리올림픽 출전을 위해 세계선수권에 나가는 것이 맞지만 선수들마다 생각이 다 달라 체조협회가 일방적으로 어느 대회를 나가라고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올림픽 남자 도마에서 금메달을 딴 신재환 선수의 경우, 이미 병역 특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절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루운동의 기대주 류성현 선수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류성현은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의 기대를 모았지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아쉽게 4위에 머물렀습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중국과 일본의 2진급 선수가 나온다면 류성현의 금메달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류성현은 올해 20살인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자 선수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쿄올림픽 도마에서 동메달을 따낸 여서정을 제외하면 파리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낼 만한 선수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아시안게임을 포기하고 내년 세계선수권에 나간다 해도 객관적 전력상 파리올림픽 단체전 티켓을 확보하는 것도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파리올림픽 출전과 메달 획득이 모두 어렵다고 판단한 선수들은 잘하면 동메달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아시안게임 출전을 원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항저우아시안게임과 2023년 세계선수권 일정이 겹치면서 한국 체조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가운데 피해를 보게 됐습니다.

권종오 기자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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