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 칼럼] 당헌 수난시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2. 8. 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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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가 문제인 줄 알았다. 선거법이 문제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개헌과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디테일 속에는 악마도 천사도 함께 있다. 개헌 없이 지금의 법률하에서 정당만 제대로 운영해도 한국 정치를 훨씬 나아지게 할 수 있다. 미국 민주당의 경우를 보면, 대선 후보를 선출할 때 포퓰리즘 같은 일시적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지나간 세 번의 대선에서 주별 득표율을 합산해 대의원 수를 할당하고 지역적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선거인단은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 중 적어도 한 명은 자신의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에게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법률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정당의 당헌이다. 공화당도 비슷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정당이 사적 이익집단이 아닌 공적 기구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모든 시민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당헌 자체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국도 법률 개정 없이 얼마든지 비슷한 내용의 당헌을 도입할 수 있지만, 한국의 정당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디테일 속에 천사가 있지만 불러내지 않는 것이다. 반면 디테일 속의 악마를 활용하는 방법은 갈수록 노골적이 된다. 이런 일은 양대 정당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어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탓할 일도 못 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꼼수를 꼼수로 덮는다는 자평까지 나온 국민의힘 사태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특정인을 찍어내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했는데 법원이 그 정도는 비상사태가 아니라고 하니 이제는 진짜 비상사태가 되어버린 웃지 못할 여당의 상황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게다가 의원총회는 법원이 비상사태 아니라고 한 것을 비상사태로 만들기 위해 당헌·당규를 개정하고 비대위를 새로 꾸린다는 그야말로 비상한 결정까지 내렸다. 그나마 국민의힘 전국위원회 의장인 서병수 의원이 전국위 소집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최소한의 브레이크를 걸어놓기는 했는데, 정권 초 살벌한 권력 다툼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 싸움이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하건 말건 상관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졸지에 고립무원이 되어버린 윤석열 대통령은 당내 권력 다툼을 준엄하게 질책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비록 당내 기반이 약하지만 임기 초반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77.77%라는 역대 최고 득표율로 이재명 대표를 당선시킨 더불어민주당의 사정 역시 여당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당선이 유력했던 이재명 의원을 위한 방탄 논란의 한복판에는 뜬금없게도 직접민주주의가 있었다.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데에도 당헌 80조를 개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권리당원 투표 반영비율을 높이자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재명 후보는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주장해왔다. 친이재명계 의원들도 같은 주장을 퍼뜨렸다. 이 후보는 “지역적인 어려움과 규모의 문제 때문에 직접 모여 결정하기 어려웠던 상황” 때문에 간접민주주의가 채택되었던 것이라며 통신과 교통이 발전한 오늘날은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할 수만 있으면 직접민주주의가 더 바람직한 것인데 그동안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거짓말이다. 미국 헌법의 배경이 된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의 저자들인 알렉산더 해밀턴이나 제임스 매디슨은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을 가져올 위험을 지적했고, 막스 베버는 직접민주주의가 전제군주제(Caesarism)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했다. 이들뿐 아니라 대다수의 정치철학자들이 직접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해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 나라의 규모가 크건 작건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직접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하는 나라는 없다.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수단으로만 쓰일 뿐이다. 직접민주주의의 극단에는 정당 소멸이 있다. 대의제가 필요 없는데 정당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도 필요 없이 모든 국민이 로또 맞듯이 번갈아 국회의원이 되는 ‘로또’크라시(lottocracy)가 직접민주주의의 주된 수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당헌 수난시대이다. 하지만 양대 정당에는 당원들이 내는 당비보다 더 많은 국민들의 세금이 해마다 꼬박꼬박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비틀어 특정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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