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가을 자전거

한겨레 2022. 8. 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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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가자 하늘은 파란 물감을 머금은 듯하고, 공기는 바삭하다. 청량한 계절, 가을이 다가온다. 황금빛 햇살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가자. 따사로운 가을 햇살은 어딘가 모르게 나를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촉감이 느껴진다.

산책도 좋지만 가끔은 자전거를 타보자. 요즘처럼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이 없다. 어디서든 쉽게 자전거를 접할 수 있고,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닦여 있는 곳도 많다. 환경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자전거를 타고 나들목을 통해 한강 둔치로 나가 보면 조금은 번잡한 세상에서 멀어진 기분이다. 가끔 인적 드문 새벽녘에 한강 다리의 커다란 교각을 보면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 기둥이 생각나 이국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물에 비친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이 이렇게나 많이 빛나고 있는데, 가질 수도 없는 비싼 보석들이 뭐가 그리 필요한가!’라고 생각하며 씩 웃게 된다.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 없고 몸에 걸치고 다닐 수도 없다. 별들은 하늘에 걸어 두는 것이 가장 예쁘고 노을은 술잔에 담가 먹을 때가 가장 맛이 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영사기가 돌아가듯 눈앞에는 나만의 로드 무비가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도 초록 풀과 나무들이 지친 눈을 쉬게 한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폐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화하고 치유한다. 페달을 밟는 동안 작은 천은 어느새 큰 강을 만나며 쉼 없이 흐른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면 더욱 좋다. 어딘가로 미친 듯이 달리다 보면 우울한 생각들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실제로 시작점에서 물리적 거리도 멀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도망에 성공한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자전거 페달을 밟자. 짜증, 우울, 걱정 등 부정적인 생각들이 순간 들더라도 목표지점까지 달리는 것이 우선이므로, 나쁜 감정들은 일단 떨쳐버리게 된다. 무겁기 때문이다. 자잘한 근심, 걱정보단 생존이 먼저이다.

페달을 계속 밟다 보면 허벅지 근육이 아려오고 티셔츠에서 소금기에 전 땀 냄새가 풍겨온다. 하지만 운동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흘리는 땀 냄새는 이상하게 나쁘지 않다. 머지않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상쾌하게 말려줄 것이다.

입맛도 좋아진다. 자전거를 타고 가서 먹은 초계국수는 분명 달달하고 입에서 사르르 녹는 듯이 맛있었는데, 훗날 그 맛을 잊지 못해 차를 타고 가서 먹었더니 그 맛이 안 난다는 도루묵 같은 증언들이 쏟아진다. 잠도 잘 올 것이다. 불면증에도 즉효가 난다.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와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잠든다면 질 좋은 숙면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는 불안하다. 가만히 멈춰 있으면 넘어지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두발자전거를 배우기란 쉽지 않았다. 중력은 이리저리 나를 자빠뜨리고, 아프게 했다.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

두발자전거처럼 인생도 가만히 있으면 넘어지게 된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만 넘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스스로가 원한 방향을 선택하고 나의 동력으로 중심을 잡으며 나아가야 한다. 살기 위해선 우리에게 주어진 중력을 감당하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 두발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의 그 강렬한 기억을 삶에 빗대어 노래로 만들었다. 캡틴락 정규 1집 앨범의 ‘두발자전거’라는 곡이다. “계속 자꾸 넘어졌지, 두발자전거 처음 타던 날. 마치 알을 깨고 이 세상에 처음 나온 어린 새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지, 두발자전거 처음 타던 날. 계속 나아가기 위해 페달 정신없이 밟아야만 했네.”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느껴보자.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답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고.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달렸다고, 내 온 힘을 다해 달렸다고. 자전거를 타는 동안 중력에 패배하지 않았다고.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전과 달라져 있을 것이다. 0.1퍼센트라도 우리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가끔은 불안한 두 바퀴 위에 몸을 맡겨 보자. 불안한 것은 아름답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을빛은 잊었던 감성들을 일깨워 준다. 가을 노을빛은 더욱 짙다. 어딘가로 도망치기 위해 페달질을 했던 나는 어느덧, 꿈같은 것을 좇기 위해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폭풍 같은 감정들이 풍경처럼 흘러간다. 길거리에 코스모스들은 힘내라고 손을 흔들어 준다. 꽃이 피어 있는 시기가 생각보다 짧듯이, 자전거를 타기 좋은 날씨도 생각보다 길지 않다. 제철 과일을 즐기듯 당장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고 가을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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