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식민화 사이에서

한겨레 2022. 8. 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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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지난 6월18일 오후(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남부 40여㎞에 있는 광활한 평야에서 파종된 밀이 자라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를 이용해 밀과 옥수수를 생산하는 세계 5대 곡창이다. 키이우/연합뉴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부패 정치가들과 연결된 올리가르히를 척결하는 역할을 연기한 바 있다. 지금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처럼 제대로 일하고 있는 것일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드라마 속 우크라이나의 모습과 우크라이나의 실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 국가 가운데서도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충격 요법’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국가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소득과 삶의 질은 1990년대 수준보다 더 떨어졌고, 부정부패는 온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올리가르히와 소수 엘리트는 정치인과 공모하여 자신들의 이득만을 좇았다. 여기에 개혁을 대가로 요구하는 서구의 경제 지원이 더해지면서 슬픈 결과가 나타났다. 풍요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러시아로부터 침공당한 땅 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자신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좌파적 관점으로 정당화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극화하고 있는 세계 질서 속에서 많은 국가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과 전통, 가치에 기반하여 자유롭고 주권적인 발전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는 이를 방해함으로써 대안적이고 주권적인 발전 가능성을 전복하려 한다.”

푸틴이 연출하고 있는 이미지에 넘어가지 말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야말로 제3세계의 대안적이고 주권적인 발전 가능성을 전복하는 일 아닌가. 푸틴의 수사는 전세계 대안 우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 자신을 평범한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해 거대 국제 기업에 맞서는 정치인으로 연출하고, 미국의 스티브 배넌이 경제 및 디지털 엘리트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급진적 좌파들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라.

우크라이나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교란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비옥한 토지는 중요한 자산이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많은 억만장자가 토지의 대규모 취득에 많은 투자를 하는 이유다. 바로 그 토지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자산이다. 우크라이나는 국토 대부분이 비옥한 흑토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적인 곡물 생산 지대다. 당연하게도 거대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토지의 매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실제로 이미 우크라이나 토지의 3분의 1은 미국과 서유럽 거대 기업들의 소유가 된 상태다.

이 소용돌이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쟁으로 인해 거대한 신자유주의 기획이 단기적으로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사회적 동원과 생산의 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우크라이나가 신자유주의화 과정에 제동을 걸고 올리가르히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을까?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식민화하려 시도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러시아의 주장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이후 줄곧 서구의 경제적 식민지였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스스로를 잘 방어해낸다 하더라도, 그 승리의 순간은 우크라이나의 운명에 결정적인 진실의 순간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서구를 따라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다음 두가지 점에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크라이나가 성취하려는 서구의 민주주의는 이미 위기에 빠져 있는 민주주의다. 미국은 이데올로기적 내전으로 치닫고 있고, 유럽은 비자유 권위주의로 향하고 있는 포스트 공산주의 국가들로 인해 와해하고 있다. 둘째,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유럽연합에 큰 빚을 져 승리를 거두게 되는 상황이라면, 우크라이나는 과연 우크라이나를 자신들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서구 강대국의 강한 압박에 저항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분투는 이미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성공하려면 서구의 뒤를 따르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재발명해야 한다. 물론 신러시아제국의 국가 하나로 소멸하는 편보다는 서구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좋은 결과가 아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지금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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