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나 델 레이, 여성폭력 현실 노래했다는 '반여성주의 여가수'

한겨레 2022. 8. 2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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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라나 델 레이
호평·악평의 롤러코스터 넘나들며
자신만의 영역 쌓아올린 10여년
'복종적 여성' 현실 반영한 가사에
반여성주의적 가수로 몰리기도
2012년 스위스 몽트뢰 마일스 데이비스 홀에서 열린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라나 델 레이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여성 가수를 거론할 땐 몇 가지 오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첫번째 오해. 그는 노래를 못하는 가수다. 글쎄? 그가 노래를 기깔나게 잘하는 디바인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주 장르는 아주 소프트한 블루스나 포크 록에 가까운 팝이다. 성량이 부족하지만 장르에는 더없이 어울린다. 모두가 휘트니 휴스턴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두번째 오해.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반여성주의적 여성 가수라고 말한다. 이건 이 글의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세번째 오해. 그는 힙스터들이나 좋아하는 가수다. 아, 여기서 나는 내가 늙은 힙스터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이름은 라나 델 레이다.

재앙에 가까웠던 첫 앨범 무대

라나 델 레이에 대해서 익숙하게 이야기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협소한 지인 관계망으로만 따지자면 라나 델 레이는 모두가 익숙하게 잘 아는 이름이다. 팝스타다. 나의 관계망을 넘어서는 세계에서 그는 여전히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가수다. 한국인이 맹신하는 빌보드 차트에 따르면 라나 델 레이의 노래 중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출한 건 2011년 발매된 ‘서머타임 새드니스’밖에 없다. 100위권 안에 진출한 싱글은 10곡이 안 된다. 차트 성적으로 따지자면 라나 델 레이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빌리 아일리시 같은 동 세대 록가수에 도저히 다가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싱글보다는 앨범을 많이 파는 드문 아티스트다. 지난 10년간 독특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심지어 내가 보기에 그 과정은 일종의 투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 들은 라나 델 레이의 노래는 모두가 그렇겠지만 2011년 발매된 싱글 ‘비디오 게임스’였다. 60년대 유행하던 팝송에 약간 세련된 샘플링을 얹고 21세기적인 가사를 덧붙이면 이런 노래가 나오겠지 싶었다. 2010년대의 누구도 하지 않는 음악이었다. 빌보드 차트 성적은 91위밖에 안 됐지만 비평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라나 델 레이를 ‘갱스터 낸시 시나트라’라고 불렀다. 아버지 프랭크 시나트라의 그늘을 벗어나 60년대 자신만의 족적을 남긴 낸시 시나트라는 당대보다도 요즘 음악 비평가들이 더 높이 평가하는 가수다. 그의 이름에 ‘갱스터’라는 건방지게 힙한 단어를 붙었다는 건 힙스터 비평가들이 라나 델 레이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는 소리다.

사랑은 얼마 가지 않았다. 첫 앨범 <본 투 다이>(Born To Die)가 발매될 즈음 비평가들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빨리 사랑에 빠졌다 지나치게 빨리 이별을 고하는 모양새였다. 문제는 일종의 상업적 배신감이었다. 비평가와 일부 팬들은 라나 델 레이가 대단히 ‘인디적인 것’을 보여줬지만 알고 보니 거대 기획사 인터스코프 레코드와 부유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은 ‘메이저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고 분노를 토했다. 라나 델 레이가 리지 그랜트라는 이름으로 이미 앨범을 낸 적이 있다는 사실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본명으로 안 팔리니까 근사한 예명으로 다시 상품처럼 기획한 게 아니냐고들 했다. 힙스터들이 가장 경배하는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는 최초의 열렬한 지지를 거두고 앨범 <본 투 다이>에 평점 5.5를 줬다.

거기에 에스엔엘(SNL) 무대 논란이 터졌다. 라나 델 레이는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쇼 중 하나인 에스엔엘에 출연해 데뷔 앨범의 두 곡을 불렀다. 나는 가수의 가창력에 관대한 편이다. 가수가 되려면 노래를 잘하면 되지만 그걸 넘어서는 스타가 되려면 독창적인 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라나 델 레이에게는 자신만의 톤이 있다. 그렇게 믿는 나로서도 에스엔엘 공연은 재앙이었다. 유튜브 영상에는 그를 비웃는 댓글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작하는 가수에게 이건 정말이지 치명적인 실패였다. 이후 라나 델 레이가 단독 콘서트를 멋지게 소화할 정도까지 진화했다는 변명은 내가 대신 남겨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 에스엔엘 재앙을 유튜브로 찾아보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다. 모든 인간에게는 새벽 3시에 이불을 걷어차고 싶은 순간들이 하나씩은 다 있게 마련이다.

힙스터 비평가들이 사랑한 가수

라나 델 레이는 딱히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 “우리는 죽으려고 태어났다”고 우울하게 노래하던 첫 앨범처럼 계속해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상처를 표현주의 영화처럼 노래하는 멜랑콜리한 앨범을 계속 만들었다. 심지어 앨범의 질은 계속 나아졌다. 라나 델 레이가 2019년에 내놓은 <노먼 퍼킹 록웰!>(Norman Fucking Rockwell!)은 걸작이었다. 대중적인 재미와 사운드의 실험, 무엇보다도 음악적 아름다움에 있어서 이 앨범은 2000년대 이후 최고의 록음반 중 하나다. 라나 델 레이의 첫 두 앨범을 박하게 평가하며 거의 뮤지션으로 인정도 하지 않는 듯하던 (아까 언급한)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는 이 앨범에 무려 9.4점의 평점을 줬다. 2010년대 피치포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여성 솔로 가수의 음반이 된 것이다. 2020년 62회 그래미 시상식에서도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모두가 음악적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던 가수가 10여년 만에 완벽하게 아티스트로서 평가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이 ‘처음에는 남들이 욕해도 하던 거 꾸준히 열심히 잘하면 결국 인정받는다’고? 그럴 리가. 인생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2020년 1월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62회 그래미 시상식에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노래’ 후보로 참여한 라나 델 레이. EPA 연합뉴스

라나 델 레이의 경력에서 가장 커다란 함정은 <노먼 퍼킹 록웰!>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는 도중에 찾아왔다. 라나 델 레이의 초창기 앨범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과 사랑과 폭력이었다. 그는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상처받으면서도 어쩔 도리 없이 사랑에 매달리는 나약함을 곧잘 노래했다. 라나 델 레이 노래의 특징 중 하나는 고전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에 거친 ‘거리의 언어’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 대비 효과가 그의 노래에 모던한 개성을 더해준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라나 델 레이의 지난 앨범 가사들이 가정폭력을 미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사를 뚝 떼어내고 보면 확실히 그랬다. 2012년 발매된 ‘오프 투 더 레이시스’(Off to the Races)에서 그는 “내 나이 든 남자는 나쁜 남자예요”라고 노래한다. 화자는 분명히 나쁜 남자에게 일종의 감정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해줘요”라고 노래한다.

가장 문제가 된 건 제목부터 인상적인 3집 타이틀곡 ‘울트라바이올런스’(Ultraviolence)였다. 가사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나를 때리자 키스처럼 느껴졌어요. 그가 나를 상처 주자 진정한 사랑처럼 느껴졌어요.” 물론이다. 문제적인 가사다. 하지만 음악가가 쓰는 가사는 문학이거나 일종의 영화 시나리오 같은 것이다. 앨범과 노래의 제목부터 ‘울트라바이올런스’다. 라나 델 레이는 이 앨범에서 자신이기도 하고 자신이 아니기도 한 가상의 화자를 창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살면서 겪었던 폭력적인 관계의 기억과 가상의 이야기를 뒤섞어 가사로 짓는다. 그것은 작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술가가 창조한 캐릭터가 폭력적이라고 예술가의 메시지도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추악하고 폭력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문학과 영화를 보면서 역으로 인간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곤 한다. 왜 그 논리는 노래의 가사에는 좀처럼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시적 여운 품은 세계로 건너가

라나 델 레이는 2020년에 인스타그램에 긴 글을 남겼다. “저는 제 과거의 힘들었던 관계들에 대해 언제나 솔직하게 노래했습니다. 많은 여성이 그런 관계들을 겪었듯이요. 저의 수동적이거나 복종적이었던 과거 관계들을 탐험하는 몇몇 가사들이 여성 인권을 수백년 후퇴시켰다는 비난은 지나칩니다. 저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매우 일반적이고 폭력적인 삶의 현실들에 대해서 가사를 썼을 뿐입니다.” 물론 당신은 여기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논쟁은 결국 예술이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계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런 논쟁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바로 예술의 종말일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자면, 라나 델 레이는 가사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될 시점에 이미 과거의 어둡고 뒤틀린 기운을 덜어낸 자신의 가장 위대한 앨범들을 내놓고 있었다. 사운드는 거의 포크에 가까워지고 가사는 (여전히 거친 속어를 대담하게 쓰긴 하지만) 소녀들의 우정과 삶의 희망에 대한 시적 여운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라나 델 레이를 이미 미워하기 전에 <노먼 퍼킹 록웰!> 앨범을 꼭 발견하기를 빈다. 그것만으로도 이 글은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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