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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안 온다' 8000m급 11좌 오른 의지력 최고 등반가

정영재 2022. 8. 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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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철인의 사회] 김재수 대장이 본 산악인 고미영
2009년 5월 칸첸중가를 등정할 당시 고미영.
고미영(1967~2009)은 한국 여성 산악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계 정상급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였던 그는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고산 등반 도전에 나섰다.

한 살 아래인 오은선 대장과 ‘여성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경쟁을 벌이던 고미영은 2009년 7월 11일 낭가파르밧(8,125m)에 올라 11번째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에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

이후 고미영(코오롱스포츠)과 오은선(블랙야크)이 14좌 최초 등정 기록 경쟁의 희생양이 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두 사람은 1년에 8000m급 3~4개를 오르는 무리한 일정을 강행했다. 결국 고미영은 2009년 마칼루(5월 1일), 칸첸중가(5월 18일), 다울라기리(6월 8일)를 오른 뒤 낭가파르밧까지 도전했다가 비극을 맞았다. 오은선도 14좌를 모두 올랐으나 ‘칸첸중가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대한산악연맹의 청문회 발표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에베레스트서 “매니저 맡아달라” 간청

김재수 대장이 자신이 찍은 낭가파르밧 사진을 보며 고미영의 사고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고미영은 11개 봉우리 중 10개를 김재수(62) 대장과 함께 올랐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자이기도 한 김 대장은 고미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사랑한 산악인이다. 경남 김해에 살고 있는 김 대장을 만났다. 그는 코오롱등산학교 히말라야등반과정 대표강사를 맡고 있다.

Q : 고미영 대장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나요.
A : “2007년에 제가 김해에 있는 선후배 중심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렸어요. 원정 직전에 코오롱스포츠에서 연락이 와서 고미영씨 합류를 부탁했죠. 고미영씨는 스포츠 클라이머로서는 유명했지만 고산 등반 경험은 별로 없었죠. 원정대 20명을 3개 조로 나눴는데 여성 3명이 포함된 저희 조는 전원 정상에 올랐어요. 그때 고미영씨가 ‘제가 14좌 완등을 하려는데 매니저를 맡아 달라’고 간청을 하더라고요.”

Q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A : “나는 나이(당시 47세)도 많고, 60세 정도까지 천천히 14좌 완등을 할 계획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끝까지 ‘대장님밖에 없습니다’고 떼를 쓰기에 ‘그럼 브로드피크(8,051m) 한번만 같이 가 주겠다’고 승낙했는데 결국 10개 봉우리를 함께 올랐습니다. 제가 전체적인 등반 계획과 전략을 짜고 함께 오르면서 사진과 영상도 찍었죠.”

Q :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A : “별 관심이 없었어요(웃음). 에베레스트 등반 후에 사진을 보니까 미영씨가 항상 내 옆이나 앞에 있더라고요. 나중에 물어보니 ‘매니저 부탁을 위해 의도적으로 옆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미영씨가 고산 등반가로서 체력이나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지력 하나만큼은 최고였어요. ‘같은 산에 두 번 오지는 않겠다. 이번에 실패하면 끝이다’는 각오로 산에 올랐고, 실제로 모든 원정을 한 번에 끝냈어요. 저는 ‘평소에도 납덩이가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 훈련을 하라’고 시켰어요.”

Q : 야단도 많이 쳤다면서요.
A : “평소에는 ‘고미영씨’라 부르면서 경어를 썼지만 긴박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죠. 특히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때는 위험 구간을 빨리 벗어나서 쉬어야 하는데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눈물이 쑥 빠지도록 혼을 냈어요.”

Q : 고미영씨의 인간적인 매력은.
A : “주위 사람들에겐 덜렁덜렁하고 남성적인 성격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내면은 천상 여자입니다. 늦게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작해 무척 힘들었다면서 눈물을 보인 적도 있었죠. 남한테 베푸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8000m급 등반을 성공하고 오면 회사에서 인센티브가 나왔는데 절반을 뚝 잘라서 저를 주면서 ‘대장님이 다 하시고 저는 따라만 갔는데 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아요’ 라면서 미안해 했죠.”

Q : 실제로 그랬다면 8000m급 등정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아닌가요.
A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8000m 산은 앞에서 가든 뒤따라 가든, 일을 하든 안 하든 힘든 건 똑같습니다. 업고 갈 수는 없으니 본인이 견뎌야 할 고통의 무게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Q : 오은선 대장과의 경쟁 때문에 1년에 4개 고봉을 오르는 등 무리한 등반을 했고 그게 사고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A : “오은선 쪽 일정과 상관없이 우리는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헬기를 타고 베이스캠프까지 들어간다는 자체는 좀 반칙성이 있었죠. 그런데 보통 3개월 정도 걸리는 고소 적응을 하고 나면 조금씩 쉬었다가 계속 정상 도전을 할 수 있거든요. 이걸 한 해에 한 개씩만 한다면 경비와 시간 손실이 엄청납니다. 후원사에서 연봉을 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1년에 한 번 원정을 하면서 1년치 급여를 받는 게 부담스러웠죠. 그리고 고미영씨는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체력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김 대장은 “내 계획에 고미영씨가 잘 따라줬을 뿐인데, 사실 그 일정이 무리라면 무리일 수도 있다. 히말라야 고산 등반은 봄·여름·가을에 한 차례씩 세 번 정도가 적정하다”고 했다.

Q : 사고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A : “밤늦게 정상에 도착한 뒤 내려오는데 폭풍설이 몰아쳐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도 해가 뜰 무렵 캠프4에 도착했고, 고미영씨는 좀 쉬었다가 윤치원이라는 친구와 함께 내려왔죠. 저는 먼저 캠프2에 도착해 대원들이 마실 물을 끓이고 있었어요. 육안으로도 내려오는 게 보였는데 갑자기 외국 팀 한 명이 ‘네 친구가 떨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놀라서 뛰어 올라가 보니 이미 2000m 아래 절벽으로 추락한 상태였습니다.”
2000m 절벽 추락, 헬기로 시신 찾아

Q : 왜 추락했을까요.
A : “로프를 잡고 내려왔는데 그 지점의 몇 미터에는 로프가 눈에 묻혀 있었어요. 윤치원이 발 디딜 곳을 만든 뒤 아래 로프에 몸을 묶고 기다리고 있었죠. 고미영이 내려오다가 등산화 양쪽 크램폰(아이젠)끼리 엉키면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게 된 겁니다. 윤치원이 옷자락을 잡았지만 뜯겨나가 버렸어요. 이튿날 헬기 두 대를 띄워 시신을 찾아냈고, 천신만고 끝에 국내로 유해를 송환할 수 있었죠.”

Q : 지친 고미영을 두고 왜 먼저 내려갔냐는 비난도 받으셨죠.
A : “그건 고산 등반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로프가 깔려 있는 하산길에는 선배가 먼저 내려가면서 로프의 안전을 확인한 뒤에 대원들을 내려오게 합니다. 정작 아쉬운 건 체력이 좀 남아 있던 제가 고미영의 짐을 지고 내려오거나 아예 버리고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겁니다. 장비야 다시 사면 되잖아요. 당시 제가 사업을 하고 있어서 생활에 좀 여유가 있었거든요.”

Q :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죠.
A : “한국 사회에선 특히 그렇죠. 이제 누가 8000m급 올랐다고 해서 크게 눈길을 주지도 않잖아요. 스포츠 클라이밍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8000m 고산 정상에 오르는 걸 버킷리스트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명예나 보상이 없어도 자신의 만족과 성취감을 위해 도전하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Q : 그런 버킷리스트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A : “그런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돈 모으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하되 처음부터 너무 욕심내지 말고 차근차근 도전하길 바랍니다. 히말라야에 오르려면 체력·돈·시간의 3박자가 갖춰져야 하는데 이걸 동시에 구비하기가 쉽지 않죠. 그 타이밍을 잘 잡아야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고미영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김재수 대장이 대답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어진 삶에 매 순간 충실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 “3년간 죽을 고비 함께 넘긴 연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

김재수 대장이 2010년 7월 가셔브룸 2봉 정상에 고미영의 사진을 꽂았다. [사진 코오롱스포츠]
김재수 대장은 산악인 고미영의 영원한 멘토이자 동반자였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도 산악계에서는 파다했다. ‘故고미영-김재수 대장 14좌 완등 뒤 결혼 계획’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도 나왔다. 실제로 김 대장은 고미영씨가 오르지 못한 세 개 봉우리를 차례로 오른 뒤 그의 사진을 정상에 심어놓고 내려왔다.

‘연인설’에 대해 김 대장에게 물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40대 남녀가 3년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함께 지냈어요. 연인이었냐고 묻는다면 연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14좌 완등을 마쳤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김 대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보도한 언론사 기자와는 날카로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히말라야 베이스캠프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거기서 함께 차 마시고 대화하다 보면 속마음도 꺼내놓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삼류 소설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건 곤란합니다”고 말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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