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혁명적 낙관주의'로 돌파한 역사의 격랑

최재봉 2022. 8.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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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인생 전환점 된 일본 순사 행패
장난과 농담 함께한 조선의용대
마오쩌둥 1인 독재 향한 저항까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지음 l 보리 l 2만5000원

김학철(1916~2001)은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동포 작가다. 그러나 그의 출신과 이력은 단순하지가 않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원산제2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보성고보에 재학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이 되어 1941년 일본군과 교전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갔다. 그에 앞서 194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결국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해방 뒤 서울을 거쳐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마오쩌둥이 이끈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에 반대하다가 10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80년 복권 이후에야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그는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 시대> <20세기의 신화>와 전기문학 <항전별곡>,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등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1980년대부터 한국에서 간헐적으로 출간되었지만 초기에는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은 ‘해적판’이었으며 그 뒤 정식 출간한 책들도 지금은 모두 절판되었다. 보리 출판사에서 ‘김학철 문학 전집’(전12권)을 기획하고 그의 전 작품을 출간하기로 한 것은 그런 점에서 반갑다.

항일 투쟁과 반독재 투쟁으로 점철된 생애를 담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의 작가 김학철.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달 중순에 낸 <격정 시대>(상·하)에 이어 전집 제3권으로 나온 <최후의 분대장>은 김학철이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서술한 자서전으로, 199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처음 출간된 바 있다. 개구쟁이 말썽꾼이었던 유년 시절부터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기고 민족의 독립과 계급 해방에 일로매진한 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430쪽에 이르는 본문 가운데 해방 이전 시기가 300여쪽을 차지하는 데에서 보다시피,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상징되는 독립 투쟁 여정이 책의 몸통을 이룬다.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던 김학철은 어느 날 진고개의 일본 서점에서 일본 소설을 사 들고 오던 중 파출소 순사에게 붙잡힌다. 근거도 없이 그가 책을 훔친 것이라 주장하던 일본 순사는 오토바이로 달려온 서점 점원의 증언에 그를 풀어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적선이라도 하듯 “이제 가도 좋아” 한마디로 상황을 끝내는 것 아닌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 일은 그의 “인생 항로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전환점”이 되었고, 마침 그 무렵 접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부추김이 더해지면서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간 그는 처음에는 조선 왕조의 복원을 목표라 밝힐 정도로 시대착오적이며 서투른 면모를 보였지만, 이내 의열단에 소속되어 반일 지하 테러 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장제스(장개석)가 교장으로 있는 황푸(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선다. 상하이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김구 선생의 면전에서는 ‘선생님’, ‘선생님’ 하다가도 뒤에서는 고집불통 노인네라는 뜻으로 ‘노(老) 완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일화가 재미지다. 미국 유학파인 김규식은 ‘미주 아저씨’라 불렸고, 조선의용대 총대장 김원봉은 말재주가 없어서 말끝마다 ‘말이야’를 덧붙이고는 했지만 타고난 카리스마로 존경과 복종심을 자아냈다.

“우리 조선의용대(나중에는 조선의용군)는 혁명적 낙관주의로 충만된 애국자들의 집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 일반적으로 ‘독립운동’ 하면 곧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연결시키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 장난기와 농담은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있었다.”

아무리 긴박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으며, 민족의 독립과 계급 혁명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니는 ‘혁명적 낙관주의’야말로 김학철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정신이자 태도라 할 법하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상처 난 다리가 썩어 가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패망을 “아침에 뜬 해가 저녁에 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필연적인 귀결로 생각”했다는 굳센 신념, 전쟁 말기에 감옥 안 보리밥이 더 열악한 옥수수밥으로 바뀌자 타이항산(태항산)에서 독립 투쟁 하던 당시 옥수수밥을 주식으로 삼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태항산 시절의 ‘옛 친구’와 해후상봉을 한 폭”으로 삼는 여유, 한쪽 다리를 절단한 사실을 누이동생에게 편지로 알리면서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없다”며 짐짓 호기를 부리는 태도에서 김학철의 혁명적 낙관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과 전쟁 뒤 그의 싸움은 주로 1인 독재와 우상화를 상대로 삼았다. 그는 평생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북한 김일성 정권과 중국 마오쩌둥의 통치에 대해서는 비판과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실패는 다 위대한 당을 1인 독재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서 빚어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는 마오쩌둥의 우상화를 ‘천안문 위에 올라선 벌거벗은 황제’라 규정했다. 마오 1인 독재의 해악을 폭로하고자 쓴 소설 <20세기의 신화>는 책으로 나오기도 전에 발각되어 그에게 10년의 징역살이를 ‘선물’로 안겼다.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은 그가 10년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1977년 12월로 마무리된다. 이번 보리 출판사 전집판에는 김학철의 아들 김해양이 쓴 글 세 편이 곁들여졌다. 김학철이 만난 역사 인물들, 그의 독서 편력, 그가 곡기를 끊기 시작한 2001년 9월5일부터 영면한 9월25일까지의 날들을 적은 기록이 그것들이다.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최초의 유서에 첨가한 두 마디가 우렁차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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