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상황에서 장애인으로 살아남기
[숨&결]
[숨&결] 유지민 | 대안학교 거꾸로캠퍼스 학생(고1)
지난 8일 밤 수도권 지역에 쏟아진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다세대주택에서 살던 40대 발달장애인 여성과 그의 여동생, 동생의 딸이 목숨을 잃었다. 또 동작구 상도동 반지하 주택에서도 50대 발달장애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돼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나로서는 결코 ‘남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소식들이었다. 그들과 같은 장애인이기에, 나에게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재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폭우를 포함한 자연재해, 화재와 같은 인적 재해 때 장애인은 더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는다.
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실제 재난 상황을 겪은 적은 없다.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재난 위협은 화재경보기 오작동이었다. 경보기 오작동은 드문 일이 아니고, 주변 비장애인들은 ‘이러다 멈추겠지’라고 하며 하던 일을 계속 하곤 한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나는 경보음이 들리는 순간 자신에게 수백가지 질문을 던져야 했다.
지금 나가야 하나? 휠체어는 버려야겠지? 계단을 기어서 내려갈 수 있을까? 기어서 내려가면 코와 입은 어떻게 보호해야 하지?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내려가다 압사당하진 않을까?…. 매년 학교에서 실시하는 화재대피 훈련에서 배운 지식은 이러한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사건을 몇번 겪으면서 제대로 된 장애인 맞춤형 재난대피 훈련과 매뉴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지난 2020년 행정안전부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0년 장애유형 맞춤형 재난대응 안내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화재 발생 때 엘리베이터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대피한다’(‘지체, 뇌병변 장애인 화재 재난대응 안내서’) 등처럼 현실성 떨어지는, 형식적인 대피 방법만 적혀 있어 실제 상황에서 적용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화재 경보음을 듣고 내가 떠올렸던 질문에 답하는, 장애인들이 실제 재난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관련된 해결 방안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다.
장애인들은 큰 위협에 부닥치지 않아도 자연재해 상황에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어렵다. 최근 폭우 때 빗줄기를 뚫고 출근하는 직장인의 사진 등이 에스엔에스(SNS)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나도 이 사진들을 보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내가 저 상황이라면 비를 뚫고 출근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이는 불가능하다. 도로에 물이 차면 바퀴를 굴릴 수 없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는 금세 익사 위험에 빠질 테니 말이다. 폭설이 내려도 상황은 동일하다.
극한의 기상 상황에도 한국의 직장인들은 출근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장애인들은 폭우나 폭설 땐 출근할 수 없고, 결국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해고당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줄 회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회사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출근해야 하고, 그렇지 않아 집에 머물다가도 침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 재난재해 상황에서 한국 사회 장애인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이다.
재해는 모두에게 갑작스럽겠지만 장애인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2015년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발표한 ‘안전약자 대피 특성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 67%가량이 재난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0 장애인 실태조사’를 보면, 장애인 가운데 국민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수급자 비율은 19%로 전체 인구(전년도) 수급률 3.6%보다 5배 넘게 높았다. 재난약자의 세가지 유형인 신체적, 환경적, 경제적 요인에 모두 해당하는 장애인 비율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나와 같은 지체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신체적 특성상 재난 상황에서 스스로 대피하기 어렵다. 시각·청각장애인은 재난 상황을 인지하는 것조차 어렵다. 재난 사각지대에 놓여 목숨을 잃는 장애인들의 행렬이 언제쯤 그칠 수 있을지,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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