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해 복무하는 배움의 즐거움

한겨레 2022. 8. 2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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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수학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사회는 문제 내는 사람의 의도가 이해 안 된다. 내가 과학을 이토록 좋아할 줄 몰랐다.”

올해 우리 학교를 졸업한 규리의 말이다. 졸업 직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려고 두달 동안 학원에서 공부하며 느낀 소감이라 한다.

재학 시절 규리는 도예 작업장에서 흙 만지며 도자기 소품 만드는 활동을 좋아했다. 발달장애인 디자인랩에서 3주, 시민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4개월 남짓 사회체험학습도 경험했다. 예술이나 인권과 관련한 일을 하지 않겠나 짐작했는데 웬걸, 졸업 뒤 첫 진로를 대학으로 정한 모양이다. 자기 삶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만난 교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우리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사회에서 여러 경험을 두루 겪으며 뜻 세우는 시간을 가진다. 대학 진학을 하더라도 졸업 뒤 2~3년, 병역의무를 마치는 경우에는 3~4년 뒤에야 입학한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한다.

의문이 인다. 우리 사회는 왜 ‘열아홉살에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관념이 확고할까? 또 있다. 이른바 ‘기초교육 중시론’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크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청소년 시기에 꼭 필요한 교과 지식은 기본으로 배워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학교 밖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면 청중들이 꼭 던지는 질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9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25~34살 대학 졸업자 비율은 70%다. 미국 52%, 핀란드 45%, 독일 35%에 비해 월등히 높다. 45~54살 대졸자 비율은 한국 46%, 미국 52%, 독일 29%, 핀란드 51%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년에 접어들면 대학교육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추론할 수 있겠다. ‘기초교육’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국민 ‘공통교육’을 실시하는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의 일반 교과는 97개 교과목으로 나뉜다. ‘일반 선택’으로 좁혀도 51개 교과다. 이 가운데 무엇이 ‘기본으로 배워야’ 할 교과 지식일까?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인은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 동안 학생 1193만여명이 영어를 배우는 데 평균 연간 120만원을 지출한다. 14조원이다.(삼성경제연구소, 2006) 그 결과는 어떤가? 대부분은 영어 영화를 자막 없이 감상하지 못한다. 수학이나 과학 지식을 실생활에서 응용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린이 청소년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배웠던 지식교육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실용적 측면을 볼 때 그 효능감이 초라하고, 지식교육 자체가 지닌 인문학적 가치를 돌아보더라도 학습자의 마음과 그다지 잘 연결되지 않는다.

학교의 교육과정을 카페테리아의 차림표라 가정해보자. 카페테리아에서는 자신이 먹고 싶은 반찬을 골라 담을 권리가 손님에게 있다. 하지만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필수 섭취 구역과 메뉴가 정해져 있다. 게다가 꼭 먹어야 하는 ‘맛없는’ 영역은 무지하게 넓고, 진짜 선택해서 배우고 싶은 ‘매력적인’ 교과 영역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배움에 늦은 시기란 없다. 살아가면서 나중에 필요성을 깨달아 늦게 배워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고귀한 삶을 ‘그 시기에 필요한 교육’이라는 맹목적인 통념에 양보하지 말자. 나는 열여섯살에 수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요즘 박문호 박사의 우주 탄생과 지구의 생성에 관련된 강의, 김상욱 교수의 양자역학과 인문학을 연결한 특강들에 폭 빠져 산다. 수학, 천문학, 지구과학, 물리학이 왜 우리의 문명, 인식, 그리고 삶에 깊이 연관돼 있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됐고, 너무나 매력적인 학문이라는 사실도 알아가고 있다. 배움은 내 삶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몰입해 배운 내용 대부분은 스무살 넘어 내 삶에서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었다.

교육의 최대 적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말살하는 것이다. 자녀의 능력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욕망이 첫번째 주범이다. 학생들의 자발적 지식욕구보다 앞질러 배움과 가르침을 효율적 시스템으로 박제화하는 과잉 교육제도가 두번째 주범이다. 다음 세대의 지적 호기심을 누르지 말자. 이제 막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는 우리 졸업생 규리의 배움 의지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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