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30돌..할아버지 고향집 감나무 세그루 의미를 떠올리며
[왜냐면] 김훈
중국동포·중국작가협회 회원
24일은 한-중 수교 30돌 기념일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중 수교 뒤 강산이 세번이나 변했다. 감개무량해진다. 나한테 한국은 수교 전부터 다가왔다.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날은 88올림픽 개회식 날이다. 그날 중국 중앙텔레비전 방송은 사상 최초로 ‘88서울올림픽’ 개회식 생방송을 중계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천연색 텔레비전 수상기가 내 집에만 있었기에 이웃들은 천연색으로 서울의 모습을 보려고 내 집에 모여들었다. 모두들 올림픽 성화 봉송보다 대체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궁금했다. 한강 강변도로가 화면에 실리기 시작하면서 시청자들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손에 깡통을 들고 미군이 던져주는 씹다가 만 껌을 주워 먹는 어린이 거지 떼가 욱실거린다는 얘기만 듣고 자란 세대들 앞에 펼쳐진 서울의 거리와 한국인들의 모습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탄성도 환호성도 없었다. 조용히 화면만 지켜볼 뿐이다. 그냥 신기하기만 했다.
‘88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한민족체전 참가차 중국동포선수단 일원으로 고국 땅을 처음 밟았다. 당시 직항이 없어 귀찮게 홍콩을 거쳐야 했다. 한국에 체류하며 고국의 발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고국의 모습이 하나 있다. 할아버지 고향집 뒷마당에 서 있는 해묵은 감나무 세그루다.
할아버지 고향은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이다. 만주가 살기 좋다고 가솔들을 이끌고 중국 땅을 밟은 할아버지는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할아버지에게 광복은 “고향 간다”로 통했다. 용정까지 기차 타고 나왔는데 소련군과 미군이 38선을 그어놓는 통에 고향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광복이 가지는 의미를 나라적인 차원에서 다루면 나라를 되찾은 것이지만, 개개인들의 운명을 보면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내 가문의 경우를 보면, 광복은 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향의 설움을 가증시켰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은 땅에 그어진 ‘38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까지 이른다.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군사분계선은 실향민들의 가슴에 풀래야 풀 수 없는 한이 맺히게 했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설이면 꼭 손자들에게 언 감을 사주셨다. 장남인 나는 할아버지가 사준 감을 먹고 배탈이 난 적이 있다. 해서 할아버지에게 왜 감만 사주느냐고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 고향집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긴 감 몇알을 쳐다보면서, 그제야 왜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감만 사주셨는지 알 수 있었다.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할아버지의 향수였다. 못 잊을 추억이 서리고 서린 곳, 산을 봐도, 물을 봐도, 하늘에 나는 새를 봐도 고향 생각, 세상 만물에 고향에 대한 애수를 담아 봤을 할아버지에게 감 맛은 고향의 맛이었을 것이다. 비록 할아버지는 고향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감을 사주며 손자들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다.
할아버지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삼년 제를 지낸 뒤 할아버지 분골을 연길 부르하퉁하에 띄웠다. 부르하퉁하가 두만강에 합류하고 두만강이 흘러 동해로 흘러들겠으니 언젠가는 고국산천 그 어느 기슭에라도 닿을 테지. 그러면 고향에 간 셈, 그날 분골함에 담배도 띄웠다. 고향 가시는 길에 지치면 담배 쉼이라도 하며 가시라고.
감나무를 보면서 고향이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새삼 느꼈다. 수교 뒤 나는 한국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한국행 여객기를 타면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고향집 감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한-중 수교가 10년만 먼저 이뤄졌더라면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 몇십년 실향민으로, 이방인으로 살아온 한을 다만 얼마라도 풀었을 것이다. 한-중 수교 30돌에 축복의 말을 보탠다. 인도의 시성이자 아시아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타고르의 시 한 구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타고르가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3·1운동에 크게 감동받아 1929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시라고 한다. 타고르의 기원대로 나의 고국은 “동방의 밝은 빛”이 되었다. 중국도 역시. 그 빛이 더 빛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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