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비금융사업 확대, 우려도 많다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은 부동산, 자동차, 교육 등 여러 기업과 제휴를 맺고 금융·비금융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은행앱을 통해 부동산 매물 추천 및 연계 금융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고, 어린이 대상 학습프로그램도 구매할 수 있다. 인도 최대 상업은행인 SBI는 자사 플랫폼(YONO)을 통해 고객의 카드결제 빈도가 높은 교통, 여행, 온라인쇼핑 등 비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교통편·숙박시설 예약은 물론 구매정보에 기반을 둔 상품 추천과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1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 은행 BBVA는 자체 부동산 플랫폼을 통해 부동산 정보 서비스와 연계 모기지 자문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금융서비스제공법 시행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금융상품 중개업 규율체계를 새롭게 정비한 바 있다. 예금·대출·보험·투자 등 4개 금융상품을 함께 중개할 수 있는 단일 라이선스를 마련하고 온라인에도 똑같이 적용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앱 하나로 은행, 보험, 카드, 증권 등 다양한 금융서비스는 물론 비금융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는 '수퍼앱' 탄생이 멀지 않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3일 열린 '제2차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 금융회사의 플랫폼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안 건너간다'는 일본보다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불필요한 규제를 풀겠다고 나선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금융수장인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빅블러'(Big Blur·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 시대에 맞춘 규제 개혁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금융규제 혁신의 목표는 금융산업에서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소 과장된 목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과감한 규제 혁신에 나서겠다는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규제 개혁 과정에서 나타날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원칙의 훼손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을 지울 수 없다. 금융규제혁신회의가 우선검토를 추진하는 36개 세부과제 가운데 첫 번째가 '자회사 투자 제한 완화', 두 번째가 '금융회사의 부수업무 규제 완화'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하겠다는 입장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금융규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불합리한 규제를 과감히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산업자본의 금융회사 지배를 막는 금산분리 원칙을 바꾸는 것이 아닌, 금융자본이 다양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산업자본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금융위는 은행이 사용자환경·경험(UI·UX) 디자인 회사, 부동산 등 생활서비스 업체, 중소기업 사업지원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 등을 인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계획이다. 배달앱 사업을 희망하는 은행을 위해선 부수업무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금융규제혁신회의의 본격적인 첫 회의 안건에도 금융회사의 플랫폼 업무 활성화를 위해 부수업무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은행들이 자유롭게 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까. 우리나라는 사기업인 은행을 기관이라고 부를 정도로 공공성을 강조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철지난 '관치금융'이라는 용어도 다시 유행어가 됐다. 특히 은행은 뚜렷한 주인이 없다보니 지주회사 회장 등 최고경영자(CEO) 인사에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한다. 연임을 노리는 CEO 입장에서는 정치권의 눈치를 더욱 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주인 없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기업 인수·합병(M&A)이 실패로 돌아가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특혜 의혹은 더욱 문제다.
70년대에 국내 10대그룹에 포함되기도 했던 대한전선그룹은 후계구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룹 경영권을 손에 쥔 전문경영인이 무분별한 M&A를 추진하다가 결국 그룹이 해제되는 수순을 밟았다.
국민기업으로 불리는 포스코는 2010년 성진지오텍 인수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전정도 전 성진지오텍 회장은 2010년 3월 11일 산업은행의 성진지오텍 신주인수권을 주당 9620원에 총 446만주를 취득했고, 일주일도 안 된 같은 달 17일에 포스코에 주당 1만6331원에 팔았다. 누가봐도 이상한 거래다. 게다가 성진지오텍은 경영난이 심각한 상태였다. 포스코는 성진지오텍을 자회사인 포스코플랜텍에 합병시켰는데 이후로도 적자가 지속되면서 3000억원가량을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결국 포스코는 성진지오텍 인수로 50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은 셈이다.
성진지오텍 인수를 승인한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은 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지만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포스코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포스코는 또 원전 관련 업체 삼창기업을 인수했을 때도 고가인수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KT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KT는 지난 2016년 자본금 2억6000만원의 엔서치마케팅(현 플레이디)을 600억원에 사들였다. 당시 엔서치마케팅의 기업 가치가 200억원 수준으로 평가됐는데 400억원이나 더 높은 가격을 지불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연간 1조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KT에게 400억원은 푼돈이었겠지만 누군가는 막대한 매각 차익을 챙긴 셈이다.
다시 은행으로 돌아와보자. 취업비리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은행들은 누군가의 청탁에서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UI 디자인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은행들의 M&A 리스트에 고위 공직자와 관련된 회사들이 오르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너무 앞서나간 걱정이고,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부디 이런 문제들이 생기지 않게 금융당국이 철저한 대책을 준비하길 바란다.
강길홍 금융부동산부 팀장 sliz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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