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전신주에 올라 감전되고 떨어지고

주하은 기자 2022. 8. 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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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의원실과 〈시사IN〉의 취재 결과 최근 5년간 최소 17명이 전신주에서 목숨을 잃었다. 홀로 전신주를 오른 노동자들이 감전되고 떨어지고 있다. 왜 참극은 반복되는가.
7월20일 전북 군산시에서 배전 노동자 최낙규씨가 승주작업을 하고 있다.ⓒ김흥구

7월4일 오전 9시40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위치한 청년임대주택 공사장에서 40대 남성 고 아무개씨가 추락해 사망했다. 고씨는 공사장 입구에 있는 16m 높이의 전신주에 올라 전선 철거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전신주에 둘러맨 안전로프도 사고를 막아주진 못했다. 안전로프는 고씨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찢어져버렸다. 추락 직후 고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2시간 후에 사망했다.

사고 나흘 뒤인 7월8일, 고씨가 사망한 공사 현장은 임대주택 입주를 일주일가량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반면 사고가 일어난 전신주 주변은 고씨가 작업하던 환경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가 타고 올라간 것으로 추정되는 사다리는 여전히 전신주에 기대어져 있었고, 정리되지 않은 전선이 어지러이 매달려 있었다.

하늘로 뻗은 철근콘크리트 기둥 없이, 우리 삶은 유지되기 어렵다. 그물망처럼 이어진 전신주는 전국 각지에 전기·통신을 공급해준다. 그러나 높게 뻗은 전신주에서 노동은 더러 참극으로 이어진다. 불행히도 이 참극은 기록되지 않는다. 관계 당국은 한 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신주에서 사망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시사IN〉은 윤미향 의원실(무소속)과 함께 최근 5년간 승주작업(전신주에 올라가서 하는 작업) 중 발생한 사망사고 통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윤 의원에게 보낸 자료는 ‘미완성’이었다. 고용노동부가 현재 파악 중인 사망사고는 5년간 총 22건이다. 이 통계에는 전신주가 아닌 철탑(송전탑)에서 일어난 사고도 포함됐으며, 2022년 발생한 사망사고는 한 건도 기록돼 있지 않았다. 고씨의 사망마저도 고용노동부 통계에는 빠져 있었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조차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신주에서 떨어져 사망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사IN〉은 고용노동부 통계에 포함된 사고의 재해조사 의견서를 확인하는 한편,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사망사고도 별도로 조사했다. 〈시사IN〉이 자체적으로 확인한 사망사고까지 더하면, 최근 5년간 최소 17명이 전신주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된다. 올해 발생한 사망사고만 해도 3건이 더 있었다. 지난 3월23일 경북 영덕에서는 전신주에서부터 건물까지 전선을 연결하던 60대 남성이 6m 높이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4월28일 전남 광양에서도 전선 연결 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5m 높이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5월3일에는 KT 협력사의 발주를 받아 무선망 시설 공사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60대 남성이 5m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왜 참극은 반복되는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먼저 누가 전신주에 오르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전신주에는 전선과 통신선이 설치돼 있다. 전선과 통신선을 새로 연결하고 정비하는 이들은 전신주에 올라 안전로프에 몸을 맡긴 채 작업을 한다. 한국전력공사(한전) 배전협력업체 소속의 노동자와 통신 3사(KT·LG유플러스·SK브로드밴드) 및 케이블방송 회사 소속 기사, 전기공사 업체 노동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최낙규씨(43)는 KT 자회사인 KT서비스남부(비수도권 담당 자회사)에 소속된 AS 기사다. 그는 전북 군산시 산북동과 소룡동에서 접수된 신고를 담당한다. 7월20일, 그의 일과는 오전 9시에 시작됐다. 그날 아침 그가 받아든 작업은 총 15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작업량이었다. 이틀 전 비가 내려 끝마치지 못한 작업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장마철이라 날이 맑은 이날 최대한 많은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하루 작업량을 확인한 최낙규씨는 홀로 사다리와 통신장비를 가득 채운 차를 타고 고객의 집으로 출발했다. 방문하기 전까진 고객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작업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운이 좋으면 건물 내부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작업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날 오전에 들른 곳은 ‘운이 좋지 않은’ 경우였다. 논밭 사이에 있는 공장 옆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컨테이너 천장부터 늘어진 통신선은 옆 건물 담벼락을 넘어 길게 이어졌다. 높이 2m가 넘는 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 발견한 전신주(통신주)는 논과 담벼락 사이 비탈에 세워져 있었다. 전신주 옆에는 사다리를 세울 만한 평평한 공간도 없었다.

전신주에 닿기 위해 높이 2m 넘는 담벼락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최낙규씨.ⓒ김흥구

임시 조치로 최낙규씨는 세 뼘 남짓한 흙 둔덕을 발로 다져 땅을 최대한 고르게 만들었다. 사다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최씨는 능숙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신주 양쪽에 박혀 있는 발판 볼트를 밟고 5m 높이의 전신주 끝까지 올라갔다. “만약 여기서 사다리가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여기선 누가 신고해주지도 못해요.”

2인1조 돕는 전담 인력, 단 한 명

최낙규씨가 속해 있는 KT서비스지부 노동조합은 2인1조 작업을 요청해왔다. 혼자서 승주작업을 하면 사고가 났을 때 신속하게 신고하기 어렵다. 작업을 혼자 하게 되면 승주 횟수도 늘어난다. 전신주에 올라 작업을 하고, 전신주에서 내려와 작업 결과를 확인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추락 사고는 전신주를 오르내릴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치지 않으려면 승주 횟수 자체를 줄이는 게 중요하죠”라고 말했다.

모회사인 KT 본사 측의 해명은 현장 실정과 동떨어져 있다. KT 측은 〈시사IN〉에 “현재도 2인1조 작업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위해 필요한 인원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낙규씨가 속한 자회사에서는 2인1조 규정이 오히려 후퇴했다. 최씨는 “지난해 말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승주작업을 2인1조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적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올해 5월께부터는 이 지침이 더는 내려오지 않았고, 2인1조 작업을 위한 인력 충원도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종성씨(가명)가 속한 KT서비스북부(수도권 담당 자회사) 산하 지점은 2인1조로 승주작업을 보조하기 위한 전담 인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씨는 여전히 대부분 홀로 전신주에 올라간다. 전담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2인1조 작업을 준수하다 보면 일이 지연되기 때문이다. 이씨와 같은 업무를 하는 개통·AS 기사는 20여 명이지만, 2인1조 작업을 돕는 전담 인력은 단 한 명이다.

여러 명이 지원 인력을 동시에 요청할 경우, 누군가는 일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대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처리시간 지연은 성과급 중심 급여체계를 가진 KT 자회사 소속 서비스 기사들에게 치명적이다. 실적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기본급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씨는 “기본급이 200만원 내외밖에 되지 않아 서비스 기사 대부분이 주말에도 자진해 근무하는 실정이다. 지금처럼 보조 인력이 충분치도 않고 성과급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면, 2인1조 작업 의무화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승주작업 때 2인1조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단 KT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안전 관련 비영리단체 ‘일과건강’ 한인임 사무처장은 올해 4월 통신 및 케이블방송 5개사(딜라이브, SK브로드밴드, LG헬로비전, HCN, LG유플러스)에 근무하는 1037명을 대상으로 안전보건 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승주작업을 하는 733명 중 ‘승주작업 시 2인1조가 늘 지켜진다’고 답변한 사람은 11.7%에 불과했다. 홀로 전신주에 오르는 환경은 통신사·케이블방송 회사 노동자들에게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노동자 홀로 전신주를 오르는 환경이 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김흥구

한인임 사무처장은 이렇게 홀로 전신주를 타는 환경이 현행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안전보건공단이 마련한 ‘이동식사다리 안전작업 지침’에 따르면, 1.2m 이상 높이의 작업을 할 때는 2인1조로 해야 한다. 한 사무처장은 “지침에서 왜 2인1조로 작업하라고 규정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보조 작업자는 단순히 사다리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안전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험 요소는 없는지 살피고,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긴급조치를 빠르게 하기 위해 2인1조 작업이 지켜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신주에 오르는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것은 추락만이 아니다. 통신사와 케이블방송 회사들은 한전 소유의 전신주에 통신선을 거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나의 전신주 위에 통신선과 전선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들은 감전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특히 승주작업 중 감전 사고는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어 경미한 수준의 감전도 승주 노동자에게는 큰 위험 요소가 된다.

희망연대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최원철 조직부장은 지난 4월까지 대구에서 설치·수리 업무를 담당했던 10년 차 통신설비 노동자다. 2013년 어느 날 그는 통신선 작업을 하기 위해 전신주에 올라갔다가 감전 사고를 당했다. 전신주 위에서 무엇인가 팔꿈치 부분에 닿았고, 그 순간 감전이 일어났다. “가로등이 같이 달려 있는 전신주였거든요. 가로등 전선은 이곳저곳에 쓸려 피복이 벗겨진 경우가 종종 있어요. 피복이 벗겨진 부분이 절연테이프로 대충 감겨 있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 부분에 팔꿈치가 닿았던 거죠.” 감전은 따끔한 수준에 그쳤지만 순간적으로 놀란 나머지 최 조직부장은 잡고 있던 발판 볼트를 놓치고 떨어져버렸다. 다행히 안전로프가 무게를 지탱해준 덕분에 추락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사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사고였다. 실제로 2018년에 일어난 한 사망사고는 최원철 조직부장이 당한 사고와 흡사했다. 2018년 7월4일 경북 청도군에서 통신선 공사를 하던 A씨는 감전을 당한 후 8m 높이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A씨가 작업하던 위치 바로 옆에 있는 분기 슬리브(전선과 전선을 연결하는 부분)에 절연테이프가 감겨 있었는데, 오래된 테이프가 1㎝가량 벗겨져 있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A씨는 노출된 부분을 오른손으로 잡아 220V 전기에 감전돼버렸다. 감전은 근육에 경련을 일으켰고, 손을 놓지 못해 감전이 30초간 이어졌다. A씨가 추락하고 나서야 감전은 멈췄다. A씨는 안전로프를 착용한 상태였는데도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전의 승주작업 금지 조치를 비판하는 정연출 건설노조 서울전기지부 지부장.ⓒ김흥구

최원철 조직부장은 노후 전신주의 발판 볼트가 부러져 추락하는 사고도 겪었다. 2014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신주에 박힌 발판 볼트를 밟기 시작한 참이었다. 첫 번째 발판 볼트를 밟고, 두 번째 발판 볼트에 반대쪽 발을 올리는 순간 발판 볼트가 부러졌다. 안전로프를 전신주에 채 감기도 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대로 땅으로 추락해 허리를 다친 최 조직부장은 한 달 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다.

노후한 전신주의 발판 볼트가 부러져 노동자가 추락하는 사고는 승주작업 중 발생하는 주요 재해 중 하나다.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 안전기술원은 지난해 5월에 낸 교육자료에서 “노후한 한전 소유 전신주는 발판 볼트의 탈락, 고정 상태 불량으로 추락 위험이 크다”라고 명시해두고 있다. 이 역시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9년 10월23일 충북 보은군에서는 전신주를 오르던 B씨가 5m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왼손으로 잡은 발판 볼트가 노후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B씨가 오른 전신주는 설치된 지 14년이 지난 상태였다.

최원철 조직부장은 결국 ‘전신주에 오를 일’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조심히 작업하더라도 승주작업에는 언제나 감전과 추락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승주작업을 줄이기 위해 노조가 회사에 요구하는 것은 ‘서브탭 설치’다. 서브탭은 전신주에 부착된 단자 역할을 대신하는 장치로, 건물 옥상이나 벽면에 설치된다. 서브탭이 설치되면 옥상이나 지상에서 새로 망을 개통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전신주에 오를 일이 현격히 줄어든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서브탭 설치 계획에 대해 “상대적으로 수도권에는 서브탭이 많이 설치돼 있고 지방에는 적은 편이다. 순차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승주작업이라 해도 전기 분야 노동자는 통신 분야 노동자와 다른 고충을 호소한다. 지난해 11월 한전 하청업체 직원 김다운씨의 사망사고 이후, 한국전력에서 ‘특별 대책’으로 작업자가 전신주에 오르는 일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는 홀로 승주작업을 하던 중 감전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한전은 불가피하게 승주작업이 필요할 경우 “관할 사업소가 사전 안전조치를 검토·승인한 후 제한적으로만 예외를 허용하겠다”라고 밝혔다.

45년 차 배전 노동자인 건설노조 서울전기지부 정연출 지부장은 한전의 승주작업 금지 조치가 오히려 위험한 작업환경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배전 노동자의 작업은 팀 단위로 이루어진다. 바스켓(사람이 탑승하는 공간)이 달린 활선차(바스켓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차량)에서 작업을 하는 활선 노동자, 전신주에 직접 올라가는 사선 노동자, 지상에서 작업을 보조하는 조공 노동자가 한 팀을 이룬다.

정 지부장은 승주작업이 사실상 금지되는 바람에 활선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위험한 작업환경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전선과 통신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신주에는 바스켓이 충분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데, 이 과정에서 활선 노동자가 무리하게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 지부장은 “한전도 승주작업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솔직히 사고를 막는 것보다, 한전이 책임 소재를 없애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건설노조 소속 배전 노동자들은 안전한 작업환경을 갖추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도급(재하청)을 근절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전기공사업법에 따라 한전은 비상시 복구공사 외의 모든 전기공사를 전기공사 업체에 맡겨야 한다. 따라서 한전은 2년마다 입찰을 통해 전기공사 업체를 전문회사로 선정하고, 공사 금액 8000만원 이하의 배전 공사를 맡긴다. 문제는 입찰 심사가 보유 인력이나 장비를 기준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배전 시공 능력이 없는 일종의 ‘페이퍼컴퍼니’가 입찰을 따내는 경우가 생긴다.

불법하도급 막을 방법 없어

입찰을 따낸 페이퍼컴퍼니는 시공 인력과 장비가 있는데도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에 하도급을 준다. 노조에 따르면, 페이퍼컴퍼니는 하도급 업체의 사장을 자신의 이사로 채용하는 편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눈속임으로 인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다. 실제로 일하는 곳은 하도급 업체이지만, 페이퍼컴퍼니가 공사 금액의 20~30%를 수수료로 챙긴다. 입찰을 따냈다는 성과 하나만으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다.

입찰 구조 때문에 실제 공사를 시행하는 하도급 업체는 공사 금액의 70~80%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만연한 불법하도급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줄어들고, 업무량이 늘어나 안전사고가 증가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하도급 업체는 원래 공사 금액보다 20~30% 줄어든 수입을 채우기 위해 별도로 전기공사를 받아오게 된다. 이는 곧 하도급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과로로 이어진다. 건설노조 광주전남전기지부 강재학 조직국장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입찰받은 67개 회사 중 39개가 이런 식으로 하도급을 준다. 하도급 회사에선 수익률을 만회하기 위해 계속 공사를 받아온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몸이 남아나지 않게 일을 해야 한다. 무리하게 일하다 보면 사고는 무조건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연결해주는 전신주 노동이 불법하도급 아래서 위태로운 순간을 견디고 있다. ⓒ건설노조서울전기지부제공

올해 1월 작성된 ‘중대재해처벌법 대비 한전의 안전관리 대책’이란 제목의 내부 문서를 보면, 한전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전은 “입찰 참여 확대를 위한 페이퍼컴퍼니 증가로 입찰 경쟁이 심화”됐다며 “낙찰되지 않은 업체는 경영 유지를 위해 저가 위장·편법 하도급 계약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또 “하도급 업체는 낮은 수익구조로 안전관리에 대한 비용 투입이 곤란”하다는 점 역시 명시했다.

한전 측은 이 문건에 대해 “최종본이 아니며 우려 사항을 적어놓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한전은 〈시사IN〉 질의에 대한 서면 답변에서 “불법하도급 적발 시 계약 해지 및 입찰 참가를 제한하는 등 엄정하게 조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불법하도급 근절을 위해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노조가 주장하는 방식의 편법 하도급에 대해서는 별도 조사가 없었고, 실질적으로 취할 만한 조치가 없다고 인정했다. 한전 관계자는 “예산회계법 시행령에 따라 보유 인력과 장비로 입찰 자격을 제한할 수 없다. 더욱이 노조 주장대로 다른 회사 사장을 이사로 채용했다 해도, 그 사람이 이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제도 아래서 한전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고 답했다.

윤미향 의원은 “반복되는 전신주 사망사고를 보면 고용노동부 등 관계 부처의 승주작업 산재예방 관리체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감전, 추락 등 산재는 대표적인 후진국형 산재인 만큼 이를 근절하기 위해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한전 하청업체 소속의 배전 노동자 김다운씨가 비극적으로 사망하며 승주 노동 실태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떠나간 곳에서 여전히 노동자들은 홀로 전신주를 올라가고, 감전되고, 떨어지고 있다. 전기와 통신은 필수재가 되었지만, 시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서로 연결해주는 전신주 노동은 불법하도급 구조 아래서 위태로운 순간을 견디고 있다.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전신주는 970만여 개에 달한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풍경이 누군가에겐 위험한 일터인 셈이다. 970만 전신주에는, 들여다봐야 할 과거의 비극과 개선해야 할 지금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전신주가 더 안전한 일터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주하은 기자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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