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퇴근길[오늘을 생각한다]

2022. 8. 24. 08: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퇴근길에 아파트가 침수되는 장면을 목격한 대통령에게는 몇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하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대통령실 혹은 재난지휘본부로 복귀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집으로 퇴근한 뒤 침수 목격담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는 경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결정적인 재난정보를 목격하고도 무시했다는 비난만큼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 예정대로 집으로 퇴근한 뒤 다음날 참사 현장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경우다. “퇴근하면서 보니까 아래쪽에 있는 아파트들은 벌써 침수가 시작되더라고요.” 자연재난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국가지도자의 재난 대응은 예측가능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행동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다. 이쯤 되면 퇴근의 사유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이다. 우선 본인의 직업관에 관해 물어야 한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폭우 속 대통령의 퇴근에 여론이 악화되자 대통령실은 다양한 해명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고립될까봐 현장에 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계신 곳이 곧 상황실이다” 중구난방 튀어나오는 해명 중에서도 가장 의아했던 대응은 “재난을 정쟁으로 삼지 말라”는 대통령실 대변인의 입장이었다.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묻는 질문은 소모적인가?

“각하,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습니다. 미국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5분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받은 보고내용이다. 백악관은 대통령이 보고 직후 교실에서 나와 상황을 지휘했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거짓이었다. 참사 이후 구성된 9·11테러위원회는 20개월 동안 12번의 청문회를 열고 1200여명을 조사한 뒤 2만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참사 당일 부시 대통령의 행적이 분단위로 상세히 기술돼 있었고,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도 최소 7분 이상 교실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훗날 부시는 “아이들이 놀랄까봐 교실에 머물렀다”고 해명했지만, 그날의 행적 때문에 퇴임 이후에도 두고두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진, 동영상 자료와 함께 부시 대통령의 상세한 그날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소모적인’ 질문 덕분에 미국의 후임 대통령들은 재난 대응에 무거운 경각심을 갖게 됐고, 국민은 대통령에게 더 나은 대처를 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가의 동원능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판단은 재난 대응의 중요한 요소다. 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갖게 됐다.” 대통령 당선 이후 본인의 매서운 비판을 실천하지 못했던 박근혜씨는 민심을 잃고 비참한 말로를 겪어야 했다. 윤 대통령이 박근혜씨의 교훈을 잘 새기길 바란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