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개심사(開心寺)의 백일홍(百日紅)
우리 고장에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천년고찰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 서산의 개심사는 가는 길목부터 늘 특별하다. 오솔길과 개울의 시원한 물소리를 따라 걷는 솔밭과 나지막한 마루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무엇 하나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멋이 새어나온다. 그냥 편안하다.
통나무를 반으로 자른 외나무다리가 걸쳐진 연못을 지나 나타나는 개심사는 그 아담함이 편안함을 더해준다. 이 편안함은 대웅전과 심검당 그리고 범종각의 기둥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나고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나무들로 기둥을 삼아 천년을 버텨온 건축물들이다. 범종각의 기둥에는 일제의 전쟁물자 수탈의 대상이었던 소나무 송진 채취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어 아픈 기억들마저도 품어버린다. 휘어진 대로 비틀린 대로의 육송 기둥들은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 뒤틀리고 꼬여진 우리네 마음인지 곧게 솟은 기둥보다 훨씬 더한 편안함과 위로를 느낀다. 이렇게 휘어지고 갈라지며 옹이 박힌 기둥이 무너지지 않을까라는 염려는 저리로 두자. 육안으로 보이는 육송 기둥의 균열은 수직 균열이 아닌 나선의 균열이라 구조적 안전성에도 큰 문제가 없다. 굴뚝과 돌담들 사이사이의 이름 모를 풀들은 조심조심 나이를 먹어온 개심사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천년고찰에 수령 150년의 배롱나무가 구부러지고 매끄러운 줄기로 운치를 더한다. 초여름에 피기 시작해 가을까지 그 붉은색과 향기를 백일동안 유지한다고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구불구불한 줄기와 껍질이 벗겨지기를 반복하여 해탈에 이른 듯한 매끈한 줄기, 주름 잡힌 꽃잎마저도 여느 꽃나무와 다르다. 한 번에 피었다 한 번에 지는 꽃잎이 아니라, 하나의 꽃잎이 피었다 시들고 곁에 있던 또 다른 꽃잎이 피고 지면서 백일을 간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장마에도 줄기차게 버티어내는 백일홍은 늦가을이 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나목이 된다. 구불구불하고 매끈하고 가녀린 줄기만으로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한다. 뜨거웠던 여름의 백일홍의 꽃잎과 혹독했던 겨울의 나목이 치르는 탄생에서 소멸로 이어지는 윤회의 과정을 천년고찰 개심사는 지켜보았으리라. 초입의 개울에 세심(洗心)으로 마음을 씻고 경내에 들어서 개심(開心)으로 마음을 열어 뜨거웠던 날과 혹독했던 날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우리에게 누려보라고 하는 것 같다.
남쪽으로 가면 개심사와 같이 휘어진 기둥과 배롱나무가 함께 있는 건축물이 또 있다. 전남 강진의 다산 정약용선생의 첫 유배지의 숙소인 사의재(四宜齋)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다산선생은 정조임금이 죽자 대역죄인이 되어 이곳으로 귀양을 온다. 다산선생을 처음 맞이해 준 주막집 주모가 마련해 준 골방으로 다산선생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자 붙인 이름이다. 사의재는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하려는 사람의 거처라는 의미이며,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을 바로 하여 자기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생각은 맑게 하되 더욱 맑게 하고 용모는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하며, 말은 과묵히 하되 더욱 과묵히 하고, 동작은 신중히 하되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사의재에서 '경세유표'와 '애절양'과 같은 다산선생의 대표적 저서가 탄생했다. 사의재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도 개심사의 기둥과 마찬가지로 휘어진 기둥 그대로다. 사의재로 들어가는 입구에 돌담과 작은 연못이 있고 나무다리 근처에 백일홍이 있다. 개심사의 백일홍만큼의 수령은 아니지만 사의재는 넉넉한 상대가 되어준다.
아직 더위가 남아있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기둥이 주춧돌을 딛고 버티어선 개심사와 사의재의 모습이 듬직하다. 그리고 휘어지고 구부러진 그 기둥의 사연을 함께 하듯 백일홍의 꽃잎은 옆에서 옆으로, 아래서 위로 이어달리기 하듯 피고지고 하며 함께 한다.
개심사와 사의재 그리고 백일홍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 더위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살며시 열어 보라 한다. 꽃잎이 열리듯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보라 한다. 구부러지고 휘어져도 버티어 보라고. 버티는 우리를 위해 쉼 없이 피고 지는 백일홍의 꽃잎이 옆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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