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의 팔팔구구] 후회와 망각

2022. 8. 2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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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두려워하는 시구가 하나 있다.

시인 윤동주가 쓴 서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누군가 나에게 불쑥 "당신이 지금 하는 가장 큰 후회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쉽게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숱한 잘못과 후회가 많이 쌓여 있을 테지만 가장 부끄러웠던 것이 무엇인지 선뜻 기억해내거나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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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깨닫고 뉘우침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냐만…
일제강점기 억압에 순종하려
환자 치료땐 상담내용 잊으려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애써
부끄러움마저 망각의 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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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살면서 한번도 후회하지 않고 생을 마칠 사람이 있을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두려워하는 시구가 하나 있다. 시인 윤동주가 쓴 서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부끄러움으로 치자면 한점이 아니라 수만점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인 줄 모르고 살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의 결정체가 아니겠는가.

후회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늘 아래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도 후회함이 없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누군가 나에게 불쑥 “당신이 지금 하는 가장 큰 후회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쉽게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끄러운 행동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과거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마음속에 아픈 상처가 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갈 때다. 학교 가기 전에는 조선말과 일본말을 함께 썼는데 입학하고선 절대 우리나라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요구를 받았다. 만일 조선말을 쓰다가 선생님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벌을 서거나 벌금을 내야 했다. 이런 고통을 피하려면 사회가 주는 억압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조선말을 인위적으로 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자 상황이 완전히 전도됐다. 일본말을 쓰면 벌을 서야 했고 가혹한 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니 어린 학생에겐 견디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상황에 따라 맞고 틀리고가 정해지니 어른들의 세계에 실망했다. 아울러 문화말살 교육으로 이런 혼란을 부추긴 당시 일본 사람들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좋은 점은 딱 한가지 있다.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일본말을 배웠으니 일본인과 간단하게 소통할 수도 있었고 어렵지 않은 소설책은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 지금은 기억 속에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거의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어른이 된 후 전문의로 병원에 봉직하면서 초등학교 때와 유사하게 특정 기억을 억눌러야 하는 강압을 경험했다. 내가 치료를 하는 환자로부터다. 정신과 환자는 자기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치부까지 의사에게 말한다. 치료가 끝나고 건강을 회복하면 지금까지 자신이 쏟아냈던 말이 부끄럽게 느껴져 의사가 그간 들었던 말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하기 마련이다.

의학 교과서를 보면 정신 치료는 한 번 끝나면 평생 마주치지 않을 사람이 가장 좋은 상담 대상이라고 했다.

과거에 필자가 맡았던 환자 한분이 생각난다. 정신과 의사가 있어서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착각하는 그런 환자였다. 그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정신과 의사를 모두 싹 쓸어버린다면 정신 질환자가 생길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방법을 아시죠. 어떻게 하면 정신과 의사들을 한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지 말이에요.”

지금까지 상담해왔던 환자의 염원이 전달된 탓일까. 환자와 나눈 내밀한 대화를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는 습관이 생겼다. 숱한 잘못과 후회가 많이 쌓여 있을 테지만 가장 부끄러웠던 것이 무엇인지 선뜻 기억해내거나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봤다.

스스로 만들어낸 강압이 인생에서 저질렀던 잘못이나 쉬이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움마저 망각의 강으로 흘러내려 보내게 한것은 아닌지…

이근후 (이화여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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