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검수까지 15년 대작업.. "텍스트가 끌어당기면 또 도전" [나의 삶 나의 길]
"함께 번역해보자" 최권행 교수 제안
원문만 1000여페이지.. "새 번역 내가 할 줄은.."
시간과 과정 길고 요원해서 '바보짓' 후회도
2012년 딸과 함께 佛 몽테뉴 성 방문 큰 자극
왜 몽테뉴의 '에세'인가
몽테뉴가 죽기 전까지 몰입한 필생의 작품
중세적 자아 벗어나 '정신적 개인, 나' 일깨워
상실서 출발한 '행복의 철학' 현대인에 위로
심민화에게 '번역'이란
'프루스트 뜨거운 삶'이 번역·학문세계 원점
번역가는 두 언어 헤매는 탐험가이자 방랑자
"너무 피곤한 일.. 번역은 그만하고 일단 휴식"
2006년 2월, 정년보다 일찍 덕성여대 강단에서 물러난 불문학자 심민화 교수는 최권행 교수를 비롯해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이때 최 교수로부터 16세기 프랑스 최고 사상가이자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의 명저 ‘에세’를 함께 번역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원문만도 1000페이지가 넘는 ‘에세’ 완역은 그야말로 난산이었다. 제1권은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시간과 과정 역시 너무나 길고 요원해서 제2권은 심 교수, 제3권은 최 교수가 나눠 번역해야 했다. 번역하는 동안 팔에 테니스엘보가 오기도 했다. 괜히 했구나. 볼펜으로 키보드를 찍어가며 왜 내가 이런 바보짓을 했을까 후회도 했다.
―책을 번역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일단 남의 말인 데다가, 16세기에 쓰인 책이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6세기 프랑스어와 현대 프랑스어의 괴리가 우리말만큼 크지는 않아서 도전할 수 있었다. 상당히 ‘구불구불’한 몽테뉴 문장 스타일도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술이 영혼의 정처 없는 행보를 쫓아가는 일이라고 했는데, 관계대명사나 콜론, 세미콜론 등이 많이 쓰여서 문장이 길어졌고 자주 구불구불해졌다.”
―왜 ‘에세’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될까.
“몽테뉴의 ‘에세’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까닭은 아주 깊은 슬픔, 깊은 상실에서 출발한 책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작정 아름다운 거야, 라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고, 아버지가 갑자기 자신의 품에 쓰러져 죽고, 아우가 스물셋의 나이에 정구를 치다가 죽고, 결혼해서 낳은 두 달 된 첫딸이 죽고, 자신마저 낙마하여 가사상태를 헤매게 된다. 이런 상실을 통과해서 얻어낸 행복의 철학이 바로 ‘에세’이다.”
―몽테뉴는 어떤 사람인가.
“몽테뉴는 사소한 데서도 글감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경험 하나하나가 대단한 무게를 지녀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만 가지 측면, 수많은 행태에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려고 했던 사람, 그것들이 모두 인간과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알려준다고 생각한 사람, 타인을 연구하는 것이 자기를 연구하는 것이 된 사람이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석사과정 대학원생 심민화는 스승 김붕구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이날 김 교수에게서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숨겨진 삶과 문학 이야기를 담은 셀레스트 알바레의 책이었다. 김 교수로부터 딱히 책을 번역해 보라고 말을 듣진 않았다.
심민화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서산에서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70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이후 이휘영, 김붕구, 정명환 교수 등으로부터 문학을 배웠고 이들의 관심과 격려 속에 학문과 번역,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프루스트 뜨거운 삶’을 번역한 이후 그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1982),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1993),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2008) 등을 번역 출간했다.
―번역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처음에는 끝까지 빨리 번역하며 전체적인 구도를 이해한 뒤, 다시 처음부터 원문과 대조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한다. 먼저, 첫 번째 ‘빨리빨리’의 과정에서는 원어에 더 치중하며 작가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읽어내되, 너무 진을 빼지 말고 쭉 나가야 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번역에선 번역어에 더 치중하여 실팍하게 번역어와 문장을 다듬으며 조바심 내지 말고 해내야 한다. 무엇보다, 작가를 사랑해야 한다.”
“번역이 끝나서 책 한 권이 나오면 스스로 약속한다. 다시는 번역하지 않기로. 우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어겨가며 다시 번역하는 건 텍스트가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런 텍스트가 또 나올까. 나오면 또 질 것 같기도 하다.”
“공부를 잘했겠죠.”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공부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말끝을 올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남 이야기 하듯.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이야기를 할 때도 역시. “요란하게 쓰지 마시고, 그냥 끼적거려 보기도 했다고 해주세요.”
하지만 대학 교수 실체를 이야기할 땐 서늘한 단어를 얼마나 분명하고 날렵하게 던지던지! 마치 노련한 도수부가 잘 벼려진 칼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휘두르듯. “뭐 세상에서 좀 우러러봐 주는 측면이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거 다 가짜예요.”
비록 북토크와 인터뷰 단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번역가이자 불문학자 심민화는 인간의 수많은 정념과 세상만사에 대해 분명했고, 명석했으며, 개성이 뚜렷했다. 어쩌면 그야말로 몽테뉴가 ‘에세’를 통해 탄생시킨 근대적 주체였다. 세상의 모든 신분과 종교, 성, 이념 등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 주도권을 분명히 회복하고, 비판적이며, 주관적 견해를 가진…. 이 순간, 그는 어쩌면 여전히 묻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제자와 외도한 아내 ‘사망’…남편 “변명 한마디 없이 떠나”
- 백혈병 아내 떠나보내고 유서 남긴 30대...새내기 경찰이 극적 구조
- "北남녀 고교생, 목욕탕서 집단 성관계" 마약까지...북한 주민들 충격
- “배현진과 약혼한 사이" SNS에 올린 남성, 재판서 혐의 인정
- “영웅아, 꼭 지금 공연해야겠니…호중이 위약금 보태라”
- 미성년 남학생과 술 마시고 성관계한 여교사 되레 ‘무고’
- 술 취해 발가벗고 잠든 여친 동영상 촬영한 군인 [사건수첩]
- “내 친구랑도 했길래” 성폭행 무고한 20대女, ‘녹음파일’ 증거로 덜미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