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공허와 불안 어디서 왔나.. 화두 던지고 싶었다"

김용출 2022. 8. 2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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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설 '재수사' 펴낸 장강명
22년전 신촌의 미제 살인사건
다시 수사하는 형사들 이야기
살인범 광적인 심리·의식 추적
한국인 내면 허하거나 불만 많아
사회가 방향성 제시 못하기 때문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파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와 조지 오웰같은
묵직하고 진지한 작가 되고싶어

더는 신인 작가가 아니니까, 중량감 있는 소설을 써야 할 텐데…. 소설가 장강명은 2018년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을 발표한 뒤 장편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였다. 그렇다면, 현대적인 한국형 형사소설을 써보자.

제대로 된 범죄소설을 쓰기 위해 경찰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제법 많은 형사를 만났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듬해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달리 자주 막혔고, 스토리 역시 잘 수습되지 않았다. 취재가 부족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형사들을 인터뷰한 뒤 썼던 소설을 뒤집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 장강명이 사회파 형사소설 ‘재수사’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제 소설 가운데 가장 야심이 크고, 시간도 가장 오래 들였으며, 제 기를 가장 많이 빨아먹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은행나무 제공
특정한 아이디어를 확장한 것이 아니어서 소설을 쓰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1700~1800매쯤 썼을 때, 어떤 ‘위기’가 닥쳐왔다. 등단한 이래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슬럼프가 찾아왔다고,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털어놨다.

“소설의 한 60% 지점을 온 것 같은데,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앞으로도 1000매 이상은 써야 할 것 같은데. 소설이 한 권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았죠. ‘요즘 두 권짜리 소설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이 들자, 힘이 쭉 빠졌어요. 소설을 빨리 쓰는 편이라 슬럼프를 겪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술도 입에 댔다. 그 사이, 연작 소설집 ‘산 자들’(2019)이나 에세이 ‘책 한번 써봅시다’(2021)를 펴냈다. ‘그래도 어떻게든 써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버텼다. 마음을 다잡은 게 아니라 그냥 밀고 써내려갔다. 소처럼. 우직하게. 엉덩이로.

소설가 장강명이 22년 전 서울 신촌에서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 범인과,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형사들 이야기를 담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를 들고 돌아왔다.

소설은 전체 100개 장 가운데 홀수 장에는 살인 범죄자가 오랫동안 메모한 기록이, 짝수 장에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형사 연지혜와 그 동료들의 끈질긴 수사 과정이 각각 담겼다. 이를 통해 형사들이 22년 전 대학생 민소림 살인사건 수사 기록을 재검토하고 누락된 사실을 채워 나가면서 살인범을 추적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는 한편, 살인범의 기묘하고 광적인 심리와 의식 역시 과감하게 드러내 시대적 화두를 던진다.

‘표백’,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 시대적 이슈를 순발력 있고 날카롭게 포착해왔던 소설가 장강명은 왜 슬럼프까지 겪어가면서 이번 장편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그의 작품 여정은 어디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장 작가를 지난 19일 전화로 만났다. 당초 출판사 사무실에서 인터뷰할 예정이었지만, 당일 장 작가가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급히 전화 인터뷰로 바꿔야 했다.
―소설 주인공인 형사 연지혜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저는 인물을 먼저 만들어 놓고 소설을 쓰진 않는다. 다만, 연지혜 형사를 쓸 때, 범인이 한국의 경찰시스템이나 형사사법시스템과 맞서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녹아든 사람이 아닌 발을 막 들인 신참 형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열정을 바쳐야 하는 처지이면서, 어설픈 20대는 아닌 1990년대생 30대 초반이고, 특히 강력범죄 수사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참 소리를 듣는 형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에 무게감을 주는 범인이야말로 진정 주인공 같다.

“범인의 경우 오타모반이 있는 얼굴에 점이 있는 설정으로 나온다. 범인 캐릭터는 연지혜 형사보다 뒤에 나왔다. 중간에 한 번 글을 갈아엎고 다시 썼는데, 처음에는 범인 목소리가 그렇게 강하게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갈아엎을 때 범인 목소리를 전면으로 빼자고 생각해 홀수 장에 배치했고, 그러면서 범인 캐릭터도 모양을 갖춰 갔다.”

―작품 전반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 장 작가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작가인지.
 
“도스토옙스키는 조지 오웰과 함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제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준 책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다. 20대 초반 ‘악령’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도 이런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데뷔작 ‘표백’은 ‘악령’을 의식하면서 썼지만, 이번 ‘재수사’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합리화하려 했던 ‘죄와 벌’을 의식하면서 썼다.”
 
―2022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공허와 불안을 꼽았는데.

“최근 한국 현대사에 대해 느낀 감각을 표현할 단어를 찾다 보니까 공허와 불안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객관적으로 괜찮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만족하지 않고, 뭔가 좀 허하게 생각하거나 불만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 방향성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하는 방향이나 목적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공허의 기원은 물론 계몽주의가 될 것이다. 불안의 경우 모든 국민이 다 똑같이 느끼는 것 같다. 10년 뒤 2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살래, 하고 물어보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이러다가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산다. 불안의 기원을 찾아보면, 아무래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때부터였던 것 같다.”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강명은 2011년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표백’, ‘열광금지, 에바로드’,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우리의 소원은 전쟁’ 등을, 소설집 ‘뤼미에르 피플’, ‘산 자들’ 등을,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 등을 펴냈다. 한겨레문학상을 비롯해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문학동네작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파 소설가 같다. 화두는 어떤 사회 시스템이고, 그것에 대한 소설을 쓸 것이다. 이번 ‘재수사’는 분량은 길었지만, 스케일이 큰 건 아니었다. 앞으론 스케일이 크고 대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 젊었을 때 좋아했던 조지 오웰, 도스토옙스키, 스타인벡 같은 잊혀지지 않는 소설을 쓴 작가가 되고 싶다.(명작을 쓴 작가가 되고 싶다?) 네.”

우리는 지금 어쩌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아니 전혀 새로운 소설가 장강명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장강명은 몇 년 전, 아니 최소한 2018년 만났던 그와는 여러 점에서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훨씬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그러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젊은 작가가 아니라 데뷔 10년을 넘긴 중견 작가라며,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아울러 더욱 비범한 작품 비전과 야망을 가진 작가를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 이후 더 묵직한 소설들을 쓰게 됐던 것처럼 자신 역시 ‘재수사’ 이후 더욱 묵직하고 진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더욱이 장편소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태도가 우직하고 원칙적으로 바뀐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아니 전혀 새로운 소설가 장강명을 이미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센 숨을 몰아쉬며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우직하게 진격 중인 장편소설가 장강명의 재탄생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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