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정신노동만 해도 피로한 이유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2. 8. 2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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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들 정신노동을 지속할 때 피로감을 느끼고 때로 어이없는 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에너지를 더 쓰는 것도 아닌데 왜 정신노동을 지속했을 때 피로를 느끼고 실수도 잦아지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정신노동은 육체노동과 같다. 사람들은 둘 다 싫어한다. - 카머러 & 호가스


“이 수만 두지 않으면 됩니다...”

10년 전 한 국제바둑대회 결승 1차 전에서 이창호 9단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집이 부족했던 상대 중국 선수가 무리하게 공격하다 역습을 당해 오히려 대마가 잡히게 생겼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뒀지만 이 9단이 적절히 대응해 좌절했고 해설자들은 “이제 돌을 던지는 일만 남았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상대가 마지막 함정 수를 뒀고 이를 본 해설자들은 “여기에 두면 걸려든다”면서도 “바둑 유단자이면 금방 알 수 있는 꼼수”라고 덧붙였다. 30대 후반인 이 9단이 초읽기에 몰리면 실수가 종종 나오지만 설마 이 수를 못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왠지 예감이 불길했다.

1분 뒤 이 9단의 손은 바로 그곳을 향했고 돌이 놓이는 순간 해설자들은 탄식하며 절망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뒤이어 중국 기사의 착점이 이어졌고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 이 9단은 돌을 거뒀다. 이틀 뒤 열린 두 번째 대국에서 이 9단은 무력하게 패배하며(아마도 1차전 후유증으로) 준우승에 그쳤다.

○에너지 고갈과 무관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심하게 느끼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들 정신노동을 지속할 때 피로감을 느끼고 때로 어이없는 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을 ‘인지 피로’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다. 육체노동이 몸의 근육을 쓰는 것이라면 정신노동은 뇌의 뉴런을 쓰는 것만 다를 뿐 역시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 피로감을 느끼고 수행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정신노동의 피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집중해서 뭔가를 할 때나 멍때리고 있을 때 뇌의 전반적인 활동도는 비슷하고 따라서 소모하는 에너지도 별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정신노동을 하지 않을 때도 뇌의 몇몇 영역은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이를 디폴트모드네트워크라고 부른다. 바둑대국처럼 뇌가 어떤 일을 하면 해당 영역이 활발해지는 대신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꺼져 전체적인 에너지 소모량은 별 차이가 없다. 뇌가 에너지를 덜 쓰려면 잠을 자야 한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더 쓰는 것도 아닌데 왜 정신노동을 지속했을 때 피로를 느끼고 실수도 잦아지는 걸까.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인 에너지(또는 자원) 소모 이론은 힘을 잃었지만 또 다른 가설인 독소 축적 이론이 아직 남아있다. 정신노동으로 뇌가 혹사하면서 축적된 노폐물의 독성으로부터 뇌를 보호하기 위해 피로를 느끼고 뇌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인지 피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노폐물을 청소할 때까지 더 만들지는 않게 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실제 인지능력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인 ‘측면 전전두피질(lPFC)’의 활성은 정신노동이 지속될수록 감소한다. 한마디로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가 인지능력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축적을 막으려고 하는 독성물질은 무엇일까.

자기공명분광법으로 정신노동의 강도에 따른 뇌의 대사물질 농도 변화를 분석한 결과 인지 활동에 관여하는 측면 전전두피질(lPFC)에서 글루타메이트(Glu) 농도와 확산에서 차이가 났다. 반면 시각피질(V1)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뇌 영역에 따라 달라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22일자에는 이 질문에 답하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파리뇌연구소가 주축이 된 프랑스 공동 연구자들은 정신노동을 할 때 뇌의 물질 농도 변화를 분석한 결과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유력한 후보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피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정신노동의 강도를 달리한 실험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화면에서 알파벳을 연속해 보여주며 강도가 약한 쪽은 지금 보는 게 ‘바로 앞의 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묻고 강도가 강한 쪽은 ‘세 번째 앞선 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묻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정답을 말하려면 실험 내내 신경을 훨씬 더 많이 써야 한다.

정신노동의 강도에 따라 인지 피로가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는 행동심리학 방법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선택’ 실험이다. 인지 피로가 심해질수록 판단력이 흐려져 충동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40유로를 받는 조건과 한 달 뒤 50유로를 받는 조건 가운데 선택할 때 정신노동이 길어질수록 인지 피로로 전자를 택하는 비율이 늘어난다. 실제 이번 실험 결과도 강한 정신노동을 한 그룹이 약한 정신노동을 한 그룹에 비해 충동적 선택을 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연구자들은 자기공명분광법(MRS)으로 정신노동을 지속할 때 일어나는 뇌의 측면 전전두피질에서 대사물질의 농도 변화를 측정했다. 그 결과 MRS가 확인할 수 있는 대사물질 가운데 글루타메이트만이 실험군(강한 정신노동)과 대조군(약한 정신노동)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전자가 후자에 비해 농도가 높았다. 정신노동을 지속하면 글루타메이트 농도가 올라가고 어느 선을 넘으면 인지 피로가 나타나 더이상 축적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각피질(V1)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 의도적으로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시각피질의 뉴런은 늘 활동하기 마련이지만 오후나 저녁이 돼도 시각의 오류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즉 시각 피질에서는 지각 피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 실험군과 대조군의 시각피질에서 글루타메이트의 농도 차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측면 전전두피질의 활동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번 실험 결과만으로는 명쾌한 답을 할 수 없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답이 될 수 있는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측면 전전두피질은 정신노동뿐 아니라 인지능력이 필요한 의도적 활동에서도 동원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측면 전전두피질이 계속 가동된다는 건 우리가 의도적인 특정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이고 별 성과 없이 몸만 축나거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뇌는 이런 활동을 그치게 하려고 피로를 느끼고 측면 전전두피질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게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 몸의 병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바로 하나만 먹을지 15분을 기다려 하나 더 먹을지 정하는 ‘마시멜로 실험’은 훗날 아이들의 교육과 소득 수준을 예측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마시멜로 실험은 경제적 선택 실험의 하나로, 동일인도 인지 피로도가 높아지면 충동적 선택(바로 하나를 먹는 쪽)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로체스터대 제공 

사실 바둑을 두거나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처럼 몸이 거의 동원되지 않는 정신노동은 진화의 관점에서 생소한 인지 활동이다. 측면 전전두피질이 정신노동을 구분하게 진화할 시간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는 정신노동만 해도 지나치면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결국 뇌의 착각이네...’라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게 과도한 정신노동이 반복되면 번아웃이나 면역계 이상 같은 여러 만성 스트레스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익숙해지면서 예전 같으면 상당히 심각한 상황임에도 각종 행사가 속속 재개되고 있다. 다음 달 4일에는 잠수교에서 3년 만에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90분 동안 의도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고 주최 측은 15분마다 심박수를 측정해 가장 멍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정한다(안정적인 하향 곡선을 그릴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뇌의 전반적인 활동량은 하는 일에 관계 없이 비슷하다. 멍때리기를 제대로 하면 디폴트모드네트워크의 활동은 늘어나면서 대신 측면 전전두피질 활동이 잠잠해질 것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측면 전전두피질의 글루타메이트 농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미래에는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자기공명분광법으로 참가자들의 측면 전전두피질 글루타메이트 농도 변화를 측정해 수상자를 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멍때리기를 하면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대신 측면 전전두피질 활성이 억제된다. 그 결과 글루타메이트 농도가 떨어지며 피로감도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열린 멍때리기 대회 장면이다. 채널A방송화면 캡쳐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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