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미·중관계사] 일본과 척지기로 한 미국의 '동방박사'

2022. 8. 2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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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30년대 미국이 '사랑했던' 중국에서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두 차례의 모략을 꾸몄다.

언론계에는 당대 미국 최고의 잡지인 '타임', '라이프'와 '포천'의 창간자 헨리 루스가, 문학계에선 소설 '대지'를 집필한 작가 펄 벅이, 학계에선 하버드대 교수 루시안 파이가 대표적 중국 로비스트로 각자의 영역을 담당했다.

그는 스팀슨의 신망과 신뢰를 한몸에 받으면서, 중국 지원과 일본 제재를 진두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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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30년대 미국이 ‘사랑했던’ 중국에서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두 차례의 모략을 꾸몄다. 1931년의 ‘9·18 사변’(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盧溝橋) 사변’으로 일본의 소위 ‘대동아전쟁’이 본격화했다. 일본은 중국을 우선 점령하고 동남아를 석권한 뒤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꿈에 젖었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국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노골적 중국 사랑을 ‘집착’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중일전쟁 발발로 미국은 전략적 딜레마에 빠졌다. 일본은 당시 미국의 아시아 최대 경제 파트너였다. 하지만 중국의 기독교화와 민주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결국 중국 지원을 결정하면서 일본과 대척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미 대통령의 중국 사랑을 초월한 참모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동방박사’(Wise Men)로 일컬어졌다. 동방박사의 최고 우두머리는 헨리 스팀슨으로, 오늘날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의 설립자다.
왼쪽부터 헨리 스팀슨, 딘 애치슨, 헨리 모건도. 출처:위키피디아
당시 이들은 백악관, 행정부, 언론계, 문학계와 학계에서 편파적으로 득세했다. 정부에는 스팀슨 국방장관, 헨리 모건도 재무장관, 해럴드 이커스 내무장관, 그리고 재무부·국무부의 차관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역임한 딘 애치슨 등이 포진했다. 언론계에는 당대 미국 최고의 잡지인 ‘타임’, ‘라이프’와 ‘포천’의 창간자 헨리 루스가, 문학계에선 소설 ‘대지’를 집필한 작가 펄 벅이, 학계에선 하버드대 교수 루시안 파이가 대표적 중국 로비스트로 각자의 영역을 담당했다.

이들의 선봉에 섰던 이가 애치슨이다. 그는 스팀슨의 신망과 신뢰를 한몸에 받으면서, 중국 지원과 일본 제재를 진두지휘했다. 문제는 그가 동방박사들과 달리 아시아에 무지했다는 점이다. 그저 동방박사에 심취한, 한 명의 광신도였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그의 무지가 아시아에 두 비극(6·25 전쟁, 진주만 공습)을 선사함으로써, 그는 아시아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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