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상태'란 해시태그가 의미한 것

한겨레 2022. 8. 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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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폭우가 쏟아진 11일 충북 청주시 무심천 하상도로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기록적인 폭우가 서울과 수도권, 충청과 전북 지역을 휩쓸고 갔다. 모두가 알다시피 기후변화가 원인이다. 폭우가 만들어낸 자연재해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너무 많은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인류가 만들어낸 인재다. 앞으로 이런 심각한 폭우가 더 자주 쏟아질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번 강남역 침수는 상징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조차 이런 변화에 준비돼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남역 침수만 보면 자연재해는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공평하게 덮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상당히 다르다. 재난이 닥쳤을 때 얼마나 피해를 보는지는 대체로 소득수준과 상당히 연관되어 있다.

재난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이자, 자연재해와 사회불평등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사회과학자인 존 머터는 <재난불평등>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머터는 재난당 사망자 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빈곤이라 강조한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형태가 동일한 재난에서 부유한 국가의 사망자 수는 빈곤한 국가의 30%밖에 되지 않는다. 일상의 차원에서 보자면, 가난한 이들은 안전하지 못한 부실한 건물이나 환경에서 거주할 가능성이 큰 탓에 재난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신림동과 상도동 반지하에 살던 발달장애인 가족과 기초생활수급자의 비극 역시 이런 맥락과 어긋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재난에서 생명을 잃을 확률이 낮아지는 반면 소득수준이 낮아질수록 그 반대가 된다. 심지어 소득수준이 높은 지역은 재난에 노출되더라도 그렇지 못한 지역보다 복구 역시 빠르다. 이런 측면에서 재난 피해는 물론 수습 역시 불평등하다.

그렇다면 재난불평등은 빈부격차가 만드는 구조적 문제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근본적인 구조를 뒤집을 수는 없어도 완화할 수는 있다. ‘자연재난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정치적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 재난에 대한 관리적 대응으로서의 행정과 긴박한 대응으로서의 정치를 결합하는 것이 정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머터는 트럼프의 사례를 들며 (특히 예기치 못한) 대규모 재난에서 정치 리더십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실제 팬데믹 상황에서 마스크를 거부하고 ‘치료제로 살균소독제를 폐에 주입하자’는 것과 같은 트럼프의 말, 행동, 결정은 지지자들의 건강과 목숨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재난에서 정치 리더십의 부재는 무척 아쉽다. 대통령은 폭우가 쏟아진 첫날, 퇴근길에 침수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대로 자택으로 가버린 것으로 드러나 논란에 휩싸였다. 그뿐만 아니다. 대통령은 발달장애인 가족이 침수로 고립돼 사망한 현장에서 ‘왜 대피가 안 됐는지 모르겠다’는 발언으로 장애인과 저소득층의 현실에 대한 무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덤으로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사망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을 국정 홍보용 카드뉴스로 제작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수해 피해 지역 복구 작업을 거들러 나간 여당 의원은 “사진이 잘 나오게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는 농담으로, 설상가상으로 여당의 수장은 의원이 평소에 장난기 많아 그런 실수를 했다는 변명으로 국민을 좌절에 빠뜨렸다.

대통령, 대통령실, 여당 모두가 리더십의 부재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현실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단절돼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가운데 에스엔에스(SNS)엔 ‘#무정부상태’란 해시태그가 번져나갔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재난 컨트롤타워가 잘 움직이고 있다고 강변했다. 이런 현실은 <재난불평등>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는) 거의 보편적으로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아무것도 통제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가 넘쳐나는데도 말이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법과 원칙은 위기 상황에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과 원칙이 안정적 일상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에는 책임 있는 말과 행위를 통해 상황 변화에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위기야말로 정치의 시간이다. 그 정치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는 이들은 언제나 사회의 취약층이고 평범한 국민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이미 이 사실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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