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시인의 마을에서는

한겨레 2022. 8.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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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시월애’는 우리 동네의 시 모임이다. 듣기만 해도 시심이 동할 듯한 이 이름은 ‘시를 넘어 사랑으로’란 뜻이란다. 도서관 동아리모임에서 시작해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문학의 궁극은 삶에 대한 사랑이니 참 멋진 이름이다.

참여하는 이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퇴직 교사, 손만두집 사장님, 디자이너 등 직업도 나이도 제각각이다. 나의 친구인 시인 애라도 시월애의 회원이자 정신적 리더다. 회원들은 매주 모여 시를 낭독하거나 직접 시를 써서 나눈다. 저마다의 색채와 온도는 다르지만 시에 대한 사랑,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한결같이 뜨겁다. 시를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 산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한때 동네에는 ‘우주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술 마시는 아줌마들의 모임’쯤 되는데, 술에 취하고 빗소리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애라가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얼핏 신파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을 떠올리면 그때 느낀 충만한 행복감이 떠올라 배시시 웃게 된다.

우연의 일치일까? 나의 시인 엄마 필명도 ‘시월’이다. ‘시작하는 달’이라는 뜻이란다. 막연히 ‘시의 달’이겠거니 생각했을 뿐 ‘시작’을 뜻하는 줄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엄마는 “만월, 꽉 찬 달은 더는 차오를 게 없지만, 시월, 시작하는 달은 앞으로 차오를 시간만 남았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배움이 많지 않은 엄마지만 오십 넘어 등단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고, 해체시 등 자신만의 시 세계를 위해 부단히 공부해왔다. 스스로를 “달을 훔쳐서 타임머신처럼 타고 다녔던 절도범”이라고 여기는 엄마의 시 세계는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그래서 어둡고 눅눅해 보이기도 한다. 엄마의 삶처럼 말이다. 그런 엄마에게 시는 ‘진흙 같은 세상에 핀 연꽃’이었다.

엄마는 지난 2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반년 동안 병원 생활을 거쳐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글 쓰는 이들이 많은 동네다 보니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인 엄마에게 따뜻한 관심과 지지, 응원을 보내온다. 지난주엔 낚시 좋아하는 이웃 마음님이 엄마를 위해 남해 바다에서 갈치를 잡아왔다. 엄마는 ‘갈치’라는 시로 응답했다.

“통영 앞 난바다에서 은빛 칼춤을 추다가/ 하얀 마음님과 눈이 맞아 예까지 따라온 무녀 (…) 입에서 살살 녹는 바다를 발라 먹으며/ 나도 심해로의 진입을 꿈꾼다/ 은빛 발하는 칼춤 한번 추고 싶다.”

엄마의 삶의 의지가 은빛 칼춤처럼 빛나는 것 같다. 오랜 침묵을 뚫고 나온 시라서 더 절절하다. 이 마을에서 엄마는 아직 차오를 시간이 많은 ‘시월’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유난히 작가가 많은 마을이다. 작년에는 아마추어 작가들 여럿이 <인생 절반 쓰기>라는 책을 펴냈다. 뒤늦게 글을 쓰기 시작한 중년 여성들이 6개월간 강의와 습작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고 책까지 펴냈다. 어떤 이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다가 경력이 단절됐고, 어떤 이는 평생 자기 글을 쓰는 게 ‘로망’이었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인생 절반 쓰기>는 이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이자 ‘구원’인 듯했다. 출판기념회를 하던 날 감동에 겨워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왜 이리 글을 쓰려고 할까? 글쓰기의 명저로 꼽히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는 고독과 고통에 맞서는 글쓰기의 힘에 관해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독의 아픔을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승화하는 것”이며, 그 고독의 시간에 내면의 깊은 곳을 응시함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탐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 서점에서 치유의 글쓰기를 이끌었던 박미라 작가도 “글쓰기는 치유이자 구원이다. 깊은 슬픔도 성찰적 글쓰기를 통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가 된다”고 말했다. 불안, 고통, 삶의 무의미를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인데 글쓰기는 무기력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무기라는 뜻이리라. 동네에서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서 이를 생생히 목도한다.

시인인 애라에게 글쓰기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지난 몇년간 암흑의 터널에 갇혀 살다가 이제야 그 긴 터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애라에게 시는 “내 영혼의 알리바이”였고, 어둠의 시간을 견디게 한 버팀목이었다. 치유이자 구원으로서의 글쓰기, 살아 있음의 증명이자 성찰로서의 글쓰기를 묵묵히 실천하는 이들이 사는 동네다. 쓸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쓰고 나면 한뼘쯤 나아지는 것 같다. 여기 시인의 마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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