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유죄 극복한 우리 사회의 당찬 여인들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2022. 8. 2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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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마하고니》, 한 세기 전에 도박과 향락의 도시 예견
《에비타》 《시카고》 등도 신랄한 현실 풍자로 카타르시스 선사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인류에게 신분제도란 봉건제 사회의 산물이다. 이미 폐지된 과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얼굴을 바꾸어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이 신분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는 집단이 계급이며 그것을 나누는 지표는 다름 아닌 '돈'이다. 인류가 원시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원시적인 물물교환을 편리하게 바꾸어 놓은 수단이 화폐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화폐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빈부(貧富)라는 신분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돈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바뀌어 욕망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돈이 많은 이와 그것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에게 세상은 각기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고 물가가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상황이 계속되면서 '런치플레이션(Lunchflation)'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있다. '점심(Lunch)'과 '물가상승(Inflation)'의 합성어로 직장인들이 점심 한 끼에 1만원이 넘나드는 비용을 지불하게 되면서 등장한 용어다. 아마도 단순하게 점심식사 비용을 걱정하는 사람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계급의 경계가 그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5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마하고니》 공연 실황ⓒClive Barda 제공

돈이 없다는 죄로 사형 선고한 '마하고니'

특히 돈이 많으면 죄가 없어지고 그 반대로 돈이 없으면 죄인이 된다는 뜻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적나라하고 소름 끼치게 표현한다. 이 문구를 연상시키는 풍자적인 소재의 무대 공연도 여러 개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독일의 좌파 작가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쿠르트 바일과 협업한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다. 이 작품은 1927년 짧은 길이의 실험적인 노래극으로 공연한 후 큰 반향을 불러왔고, 3년 후인 1930년 3막짜리 정식 오페라로 독일 라이프치히 노이에스 테아터(Neues Theater)에서 초연을 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인 '마하고니'는 욕망과 자유를 추구하는 메카로 불법적인 삶의 쾌락에 충실하도록 새롭게 형성된 가상의 도시다. 죄는 모든 욕망이 현실화되는 이 도시의 곳곳에 존재하고 사랑조차도 돈으로 살 수 있다. 이곳에서의 유일한 범죄는 돈이 없는 것이다. 부자는 왕 대접을 받고 가난한 자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는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세워진 후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어 흥망성쇠의 과정을 겪는 이 가상의 도시는 마치 오늘날 미국 서부 네바다사막에 위치한 도박과 향략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게 한다. 라스베이거스 주정부가 카지노 도박업을 합법화한 게 1931년이다. 이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빠르게 성장하게 되는데, 그보다 먼저 쓰인 이 작품은 마치 그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예술가의 선견지명을 보여준다.

막이 열리면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마하고니로 모여든다. 도시에 모여든 각계각층의 불나방들이 그 안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면서도 '폭식' '섹스' '권투 관람' '음주'라는 네 가지 행위에 빠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주인공 지미는 권투경기에 돈을 잘못 걸었다가 모든 재산을 날리게 된다. 그는 위스키 세 병과 담배 한 상자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판결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인 돈이 없다는 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쿠바 출신 혼혈로 친구들과 돈을 벌러 이 도시를 찾아온 제니라는 여인이다. 제니와 여섯 명의 여자 동료들이 부르는 '알라바마 송'은 이 작품의 전체를 통틀어 대표곡이기도 하다. 제니의 직업은 돈 쓰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매춘이다. 그중 알래스카 벌목공 출신인 지미와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알래스카에서 7년간 일하며 저축한 돈을 어느새 쾌락 추구에 탕진한 지미는 빈털터리가 돼 재판에 넘겨지게 된다. 다급하게 제니에게 돈을 달라고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한 세기 전에 쓰인 이 작품은 자본주의의 빈부격차를 무전유죄 판결과 제니의 선택으로 정확하게 풍자했다. 자본주의의 불평등 구조에서 일자리가 부족하기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가 된 여성들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남성들보다 낮은 계급에 위치할 확률이 높다. 애초의 지미와 제니의 출발선이 달랐다. 제니는 힘들게 일하고 얻은 돈을 그냥 달라는 남자를 참을 수 없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서구 멜로드라마 소재에 자주 등장하는 통속적인 매춘부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당당한 인물이다. 이러한 당찬 여성들은 무대 작품에서 많이 발견된다.

뮤지컬 《에비타》ⓒ연합뉴스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여주인공 통해 정확하게 풍자

뮤지컬 《에비타》는 주인공 에바 페론이 가난한 지방 출신에 보잘것없는 삼류 배우였지만 유능한 군인이자 훗날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페론 대령을 만나 대중 통치술에까지 눈뜨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실존 인물인 에바는 영부인으로서 여성과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지만 동시에 퍼주기 논란으로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다. 낮은 계급 출신의 여성들은 성공의 여정 전에 이미 많은 장벽이 놓여 있다. 이를 남자들의 도움으로만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많은 오해와 원성을 살 수도 있지만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캐릭터다.

뮤지컬 《시카고》 ⓒ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시카고》의 두 여주인공인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 역시 남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죄수들이다. 하지만 불평등한 경제 구조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당당함을 가지고 특유의 매력으로 대중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게 된다. 두 사람은 남자들이 쌓아올린 왜곡된 황금만능주의과 황색 저널리즘을 역이용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여인들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여성들이 고난 없이 처음부터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는 요원한 일일까. 대안이 될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사회 안전망을 갖춘 도시는 영영 존재하지 않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갈아엎는 사회주의 혁명이 그 대안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마하고니》의 다소 특별한 엔딩이 깊은 울림을 준다.

3막 20장에 이르러 지미의 사형집행이 끝난 이후 여러 시위대 행렬들이 지나가며 마하고니가 불태워진다. 하지만 그 군중들의 구호는 통일되지 않았다. 마치 무정부주의자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처럼 그 목소리들은 제각각 갈라져 있는데, 그중 일부는 더 큰 자유와 방종을 요구하고 있다. 무대 위에는 "아무도 우리를, 당신을,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 문구가 등장하며 마하고니는 인간성이 상실된 철저한 파멸의 공간이 되고 군중들은 방향도, 이유도 모른 채 계속해서 행진한다. 작가가 쓴 부조리극이 100년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잠시 극장에 모아놓고 환상을 선사하다가 막이 내리면 다시 그 부조리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가장 완벽한 환상이란 이렇듯 가장 지독한 현실과의 동전의 양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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