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무릉도원' 신도마을 도구리알의 신비한 제주 저녁노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2. 8. 21. 10:33
제주 올레 12코스에서 만나는 숨은 노을 ‘맛집’/효녀 순덕 전설 담긴 ‘무병장수’ 큰 도구리 폭포수 파도 장관/투명한 물에 사람과 노을 데칼코마니로 담는 작은 도구리에선 ‘인생샷’
기암괴석 현무암이 제주 맑은 바닷물을 가둔 작은 도구리 위로 붉게 타는 태양이 서서히 떨어진다. 마치 잘 만든 한 편의 영화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모조리 데칼코마니처럼 물에 완벽하게 담아내는 대자연의 거대한 서사시. 땅거미 질 무렵 ‘새로운 무릉도원’, 신도 마을 해안가에 서자 사람도 물도 바위도 온통 붉다.
◆숨겨진 저녁노을 맛집 도구리알
제주 올레 12코스는 저녁노을 명소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제주의 가장 서쪽인 서귀포시 대정읍과 제주시 한경면의 해안가를 따라 펼쳐지기 때문이다. 도로 이름조차 노을해안로. 바닷가를 지나며 파도와 바람이 연주하는 공연도 즐기고 들판을 지나 작은 오름에 올라 섬들이 빚는 일몰도 감상할 수 있다. 12코스는 대정읍 무릉외갓집에서 시작해 평지교회∼신도생태연못∼농남봉 정상∼신도2리 방사탑∼신도포구∼한장동 마을회관∼자구내 포구∼생이기정∼용수리 포구 절부암까지 이어지는 17.1㎞의 길로 5∼6시간이 걸린다. 올레길은 오름과 들판이 번갈아 이어지며 서쪽으로 달리다 첫 번째 바다를 만나는데 바로 신도포구 남쪽 신도2리 도구리알이다. 도로에서 절경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지나치기 일쑤다.
모슬포항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도 귀경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아주 느리게 노을해안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풍경. 푸른 잔디밭에 제단처럼 쌓은 돌무더기 위로 6∼7명이 올라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분명히 뭔가 있겠구나. 본능적으로 차를 세우고 해안으로 나섰다. ‘이곳은 돌고래들의 집이우다.’ 입구에 적힌 표지판과 아치형 기둥에 돌고래를 그려놓은 조형물이 궁금증을 쉽게 해결해 준다. 운이 좋으면 남방큰돌고래들이 수면 위로 힘차게 오르며 떼로 헤엄치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다들 돌고래가 나타나길 눈이 빠져라 지켜보는 중이다.
그들을 따라 전망대에 올라 한참 동안 바다를 응시해 본다. 하지만 돌고래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사로잡는 발아래 신비한 해안가 풍경. 제멋대로 삐죽삐죽 솟은 현무암 바위들이 장벽처럼 둥글게 에워싸며 거대한 그릇 모양을 만들었고 그 안에 제주 푸른 바다를 가둬 놓았다. 얼마나 맑은지 바닥까지 아주 투명하다. 또 하나. 파도가 칠 때마다 폭포수처럼 그릇 안으로 바다가 쏟아지는 장관이 연출된다.
이런 그릇 모양의 독특한 지형을 제주에서는 ‘도구리’라 부르는데 큰 도구리 1개와 작은 도구리 3개가 옹기종기 놓였다. 원래 도구리는 말, 소, 돼지의 먹이통을 뜻하는 제주 방언. 나무나 돌의 속을 동그랗게 파서 만드는 도구리와 이곳 지형이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이다. 도구리 사이 지형도 엠보싱처럼 올록볼록하고 달 표면처럼 작은 구멍이 수도 없이 뚫려 매우 독특하다. 바다까지 흘러내린 뜨거운 용암을 제주의 거센 바람과 파도가 밀어 올리면서 도구리의 장벽을 세우고 끌어 오르던 용암 버블은 급속도로 푹 꺼지면서 이런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졌나 보다. 재미있는 것은 거센 파도에 물고기나 문어가 쓸려와 살기도 한단다. 파도 높이와 규모를 보니 그러고도 남겠다.
도구리에 얽힌 전설이 안내판에 자세히 적혔다. 하늘나라 연회에 쓸 해산물을 구하러 신도마을 바다에 내려온 선녀들은 큰 도구리를 해산물을 넣어두는 그릇으로 사용했다. 하루는 몸이 아픈 홀아버지를 모시는 마을 효녀 순덕이 물질을 나섰다가 큰 도구리에 갇힌 거북이 세 마리를 발견하고 작은 도구리에 하나씩 풀어줬다. 거북이들은 사실 옥황상제, 서왕모, 동해용왕의 아들. 이들은 순덕의 소원을 들어 줘 아버지 병이 씻은 듯 나았단다. 그래서 큰 도구리를 ‘무병장수 도구리’로 부른다.
나중에 순덕은 서왕모 아들 현수와 혼인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편을 위해 복숭아나무를 잔뜩 심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이름 ‘신도(新桃)’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새로운 무릉도원’이란 뜻. 지금도 복사꽃 필 때 작은 도구리에 꽃잎을 띄워 소원을 빌면 사랑도 이뤄진다니 사랑을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꼭 가봐야겠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작은 도구리에는 연인들이 하나둘 줄을 선다. 연인과 노을이 물 위에 함께 투영되는 환상적인 사진을 얻을 수 있어서다. 붉게 물든 노을이 도구리로 쏟아지는 낭만적인 풍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차귀도 낙조 볼까 신창풍차해안도로 달릴까
도구리알에서 12코스를 따라 북쪽으로 8분 정도 달리면 등장하는 제주시 한경면 노을해안로 수월봉은 또 다른 낙조를 선물한다. 바다에 신비롭게 떠 있는 무인도 차귀도 덕분. 수월봉 표지석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오르다 녹고대를 지나면 보이는 운치 있는 정자가 수월봉 전망대. 해 질 무렵 이곳에 오르면 마치 별똥별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차귀도 위로 떨어지는 장엄한 일몰을 즐길 수 있다. 수월봉 아래는 세월의 신비 가득한 ‘화산재의 나이테’를 만나는 엉앙길. 해안 절벽에 놓인 화산 지질 트레일을 따라가는 길로 2㎞에 걸쳐 기왓장이나 돌판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듯, 수직 절벽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입구 왼쪽 산책로에서 더 명확한 나이테를 감상할 수 있다.
노을해안로는 차귀도포구에서 끝나지만 북쪽으로 10여분 더 올라가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샷 명소인 신창풍차해안도로를 만난다. 바다에 세운 하얀 풍력발전기가 도로를 따라 줄지어 등장하기에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잠시 차를 세우면 되는데 기기묘묘한 현무암 바위가 넓게 펼쳐진 싱계물공원이 가장 인기가 높다. 맞은편 도로에는 넓은 무료 주차장도 마련됐다. 바다 위로 놓인 다리가 예쁜 등대까지 이어져 풍차와 등대가 어우러지는 아기자기한 노을 사진을 얻는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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